본문 바로가기
일상/새길

불의한 청지기처럼 사는 방법

by 달그락달그락 2022. 9. 18.

기업의 오너(주인)가 전문경영인(청지기, 사장)을 두었는데, 이 친구가 경영을 잘 못 하고 재산을 낭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기업 대표는 사장을 불러서 해고한다고 말해. 그러자 전문경영인인 사장은 자신이 회사에서 해고당한 후에 받아 줄 수 있는 협력업체를 생각해. 지금 일하고 있는 기업에 큰 빚을 지고 있는 협력업체 사람들을 불러와서 빚을 마구 깎아 주는 거야. 아직은 자신이 사장(청지기)이고 권한이 있고 해고된 후에 이런 협력업체에서 받아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기업의 오너는 사장이 하는 짓을 알게 되지. 분노할 줄 알았는데 웬걸? 사장을 불러와서 칭찬하는 거야. 이게 무슨 상황이야? 화를 내고 고발을 해도 시원찮은 판에 칭찬이라니?

 

성경에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요즘에 맞추어 각색(?)한 거야. 신학자들 보면 개 풀 뜯는 소리(?)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내 보기에 그런 것도 같아서.

 

▲ 얀 루이켄(1649~1712년),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칭, 영국, 궁수들의 성경 삽화), 출처. 에큐메니안

 

주인은 그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였다. 그가 슬기롭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슬기롭다.”라고 하지. 무슨 말인지 한참 생각했어. 이 말에 인간에 윤리적인 내용은 아닌 것 같아.

 

일단은 주인(오너)이 칭찬한 것은 청지기(사장)가 해고당한 후에 바로 조처하는 결단과 행동력이라고 했어. 오늘 오전 목사님 말씀 듣다가 번뜩 생각이 머리에서 마구 돌아갔지 뭐야. 단호함과 행동력이 중요한 것 같아.

 

또 한 가지는 기독교인들이 모두 예수님처럼 살고자 믿으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무언가 한다고 하지만 자신이 죽은 이후에 간다는 천국을 위해서 이 땅에서 삶을 잘 살지 못하는 것을 역설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청지기는 자기가 잘린다고 말을 듣자마자 바로 가야 할 길을 개척해 가는 거잖아. 기독교인들이 가야 할 곳이라고 믿고 있는 이 땅 이 이후에 나라를 위해서 도대체 무엇을 하느냐는 거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라고 하시는데 이 부분도 생각이 많았어.

 

불의한 재물은 맘몬 즉 탐욕의 상징이거든. 신의 반대편에 있는 나쁜 것으로 우리 사회의 물질만능주의와도 같은 문제로 인식하곤 해. 이러한 돈과 욕망 등 탐욕이 없어질 때 처소로 들어가야 한다는 거야. 여기에서 처소는 신이 계신 곳이잖아. 모든 기독교인들이 원하는 그 곳 말이야.

 

살아 있을 때 마음대로 탐욕을 부리며 살다가 마지막에 천국 가라는 건가? 그렇지 않아. 물질적인 부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은 부를 필요한 곳에 나누고 심으라는 말과 같아. 이렇게 해석하고 나니 구절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 세상에 뿌려진 돈과 명예, 사회적 위치 등 수 많은 욕심(탐욕?)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고 함께 하라고 말씀하시는 거잖아. 불의한 청지기가 행한 일이 자신을 위해서 빚진 자들에게 빚을 깎아 주었지만, 그 일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정말 목숨과도 같은 귀한 일이라는 거지. 그 일을 통해서 결국 청지기는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가게 되지.

 

우리 또한 성경에서 말하는 선한 일을 하는 목적이 있는 거잖아. 어떤 이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불의에 항거하고 싸우는 이들도 있고, 어떤 이들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고 헌신하지. 그 모든 일의 본질은 당사자들에게 있지만, 이후에 우리 삶을 마감한 이후에는 그분의 처소에서 함께 하는 게 목적이라는 거야. 크리스천들의 본질적 이유지.

 

청지기가 모든 걸 잃었을 때 자기를 맞아줄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거야.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 또한 모든 것(생명)을 잃었을 때 자신을 유일하게 맞아줄 분에게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거잖아. 이 땅을 떠나는 순간 이 땅에서 이룬 그 모든 것은 끝나는 거야.

 

그럼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맘몬이라 일컫는 그 모든 돈과 욕망을 이 땅에서도 잘 사용해야 하는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역량도 쌓아야 하고 일도 잘 해야겠지. 그래야 뭘 나눌 게 있는 거잖아.

 

그래서인가봐. 예수님께서 한 말씀 하시지.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충실하고, 지극히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불의하다.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 충실하지 못하였으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그러게 말이야. 결국은 우리가 행하는 그 일에 이 땅에 맘몬에 둘러싸여 있더라도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거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그 모든 일에도 충실하지 못하면서 생의 이후에 참된 것을 신이 맡길까?

 

믿음이라는 것. 그 단순한 한번의 고백에서 이 땅 이후에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고 가르치는 개신교. 그 고백이 진실한 고백이 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는데 선물은커녕 눈빛 하나 주지 않는 게 어떻게 사랑이야? 기독교인으로서 세례 받으면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났다고 고백하는 그 순간 정말 내외적으로 진실하게 살아 내야 할 삶이 있는 거야. 우리 모두에 말이지.

 

그의 나라와 그의 의에 집중하기 위해서도 이 땅에 맡겨진 일에 집중해야 하는 거야. ”예수천당, 불신지옥하면서 돌아다니지 않아도 자기가 일하고 있는 직장과 가정과 지역사회의 수많은 공간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