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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새길

고래가 춤을 추어야 하는 이유는 무언가?

by 달그락달그락 2021. 11. 14.

예복 입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자신의 신분이나 직업을 통해서 인정(존중)받기를 원한다는 것이고, 어디 가거나 높은 자리 앉기를 원하는 것은 그 공간에서 대접 받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도를 길게 한다는 것 또한 보여지는 모습에 따라 인정받고 존중 받기를 원하는 모습이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 서기관을 조심하라고 가르쳤다. 서기관은 현재로 치면 법률가이면서 종교지도자정도 된다고 목사님이 말씀 해 주셨다.

 

서기관을 조심하라고 하시고 예수님은 헌금하는 가난한 과부를 칭찬했다. 가난한 가운데 모든 것을 헌금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가난한 과부의 삶을 따르도록 기도할까?

기독교인들은 검사, 판사 되어 인정받고 대접받는 삶을 위해서 기도할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이 대박 난 적이 있었다. 칭찬하고 인정하는 일은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일임을 안다. 다만 우리가 성숙해 진다는 것은 부모나 선배 그 누구의 칭찬이 아니어도 그 일의 본질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은 아닌지.

 

가난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다. 법률가가 되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주요 내용은 본질이 아닌 칭찬이나 인정을 구하면서 착취하는 무지하고 악한 이들을 비난한 것이었다. 그 일의 사명이나 가치는 등한시하고 누구에게나 인정받고 존경받기 위한 삶의 비판이다.

 

너무나 가난하지만 인간으로서 집중해야 할 가장 본질적인 가치를 붙잡고 삶을 걸면서 살아가는 과부의 모습이 기독교인이 갖추어야 할 자세였다. 그녀에게는 그 어떤 칭찬도 인정도 없었다. 오히려 사회에서 볼 때 작은 돈이었기에 조롱의 대상이었을 수도 있다. 또는 비참하게 살면서 자기 먹고 나 살 일이지 무슨 헌금이냐고 했을 수도 있다.

 

헌금을 많이 내라는 말이 아니다. 이 본문 들어 헌금 강요하는 성직자가 있다면 그런 자들 멀리할 일이다. 기독교적 가치와 이상에 집중하라는 주장이다.

 

오래 전이다. 내가 청년 시기 다녔던 미자립교회 건축한다고 해서 거의 만기 되었던 적금을 깨서 새벽예배 나가서 헌금했었다. 그 당시 시민단체 월급은 박봉 중에 최고 박봉이었고 이리저리 쪼개서 기관들 후원하고 나 쓰고 남은 돈 모두를 적금에 넣었다. 뭐 별로 쓸 일도 없었다만.

 

그 때 새벽예배 마치고 나오면서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그럼 지금 그 때의 나로 돌아가서 몇 년 간 부었던 적금을 다시 헌금하겠느냐고 묻는다면? 그 때 헌금을 하게 된 내 가슴 깊은 곳의 동기를 살피면 나는 헌금하지 않고 다른 쪽에 섰어야 맞다.

 

정말 내 가슴 바닥에 인정이나 존중이 아닌 그 본질에 가까운 이유 때문일까? 잘 못된 선교관이나 건물과 인정이 아닌 진정 하늘이었을까? 나는 그렇게 믿었지만 시간이 지난 후 알게 된 내 관점은 한 참 어긋나 있었다.

 

신앙심이 나름 있었지만 그 때의 교회 분위기와 문화는...(?) 그 때의 나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는데 생각할 지점이 너무나 많다. 모두 내가 부족한 탓이니 뭐 남을 탓할까?

 

어떤 이의 인정이나 대접, 존중이 내 삶을 흔들 수 없다. 타자에 인정에 목을 맬 필요도 없다. 그러한 인정에 흔들릴 필요도 없다. 그저 존재하는 공간의 본질이 무엇이고 삶을 살아 내는 그 순간에 목적하는 가치 있는 일에 집중할 뿐이다. 신앙을 가지고 있기에 나만 아는 하늘의 그 뜻은 보이는 내 모습이 모두임을 안다. 정말이지 얼마나 보잘 것 없을까 하는 그런 생각.

 

결론이 뭐냐고? 인정에 목매지 말자는 것. 그 활동, , 공부, 연애 등 어떠한 행위를 하더라도 근본과 이상에 집중할 일이다. 인정은 자칫 이상을 망치는 도구가 된다는 것. 인정으로 춤을 출 일이 아니다. 내가 추고 싶고 춤을 추어야 할 때 춤을 출 뿐이다.

 

.. 참고로 나는 춤을 전혀 못 춘다.. 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