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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새길

호칭에 따른 규범과 역할 : 그래도 따라 나서야.

by 달그락달그락 2021. 9. 5.

많은 아르바이트를 경험했다. 줄잡아 20여개는 넘는 것 같다. 신문배달부터 카페, 막노동판, 커피숍과 뷔페 음식점, 횟집에 삐끼, 심지어 예식장에 카메라를 잡고 결혼식 촬영까지 했다. 이 많은 알바 때에 나를 부르는 호칭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어머니께 배운 대로 어디에서나 최선을 다하는 게 내 할 일이라고 믿고 정말 죽음 힘을 다해 열심을 다했다. 알바 하면서 학교 때려 치고 함께 일하자는 횟집 사장님과 한 쪽 눈에 장애가 있었던 총괄 매니저님은 아직도 기억이 남는다.

 

첫 직장을 가졌다. 큰 기업이었고 감리원으로 모 지역 건설현장에 투입됐다. 그 때 호칭은 기사였다. 정 기사. 현장에서 감리단의 직위가 없는 초임은 기사로 호칭됐다. 일은 재미없었다. 현장을 하나 마치고 다음 현장이 나올 때까지 긴 휴가를 받았다. 할 일 없이 노는 것보다는 봉사활동 할 겸 친구 소개로 와이에서 청소년들 만나서 자원 활동하다가 전 직장을 사직했다.

 

그리고 청소년을 전문적으로 만나기 시작했다. 단체에 내 호칭은 간사였다. 시간이 지나고 부장이 되었고, 계획서 열심히 쓰고 자부담 마련해서 시설을 위탁 받아 관장이 되었다. 시간 조금 더 흐르고 단체를 사직하고 나왔다.

 

그리고 무허가 연구소를 만들었고 내가 소장이 되었다. 연구이니 장이었고 나 밖에 없으니 내가 소장이 된 거다. 이 때 후회가 됐다. 소장 말고 장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구소를 연구로 지어야 했다. 그럼 대장이 되는 거였다.

 

또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현재의 법인과 연결되었고 무허가 연구소가 허가 받는 연구소가 되어 호칭이 하나 더 붙었다. 대표가 됐다. 소장이기기도 하고 법인에서는 지부대표다. 그리고 시간이 또 흘렀고 오늘 교회에서 권사 임직식이 있었고 9명중에 한명으로 내가 서 있었다. 권사가 되었다.

 

나를 부르는 호칭의 의미와 무게에 대해서 10여 년 전에 심각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프리랜서 선언하고 개인 연구소 만들어 네트워크 중심으로 운동하고 연구할 때였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 만나지만 그 때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조직하고 연대할 때였다. 아무 생각 없이 호칭을 생각했었는데 단체 사직 후 내가 속한 기관단체가 사라진 후 내 모습은 내가 만든 호칭에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과거에 착각 했었던 것은 내가 만들어 나의 역량이 기반이 된 호칭도 있었지만 내가 아닌 기관에서 만들어진 사회적 위치와 역할에 기인하기도 했다. 이 부분이 완전히 지워지나 정말 내가 되었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바울사도가 이야기 한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 중 하나다. ‘함께하는 일이다. 환대와 열심, 존경이 녹아 있는 규범들. 이 글 읽을 때마다 부끄럽기 그지없다. 오늘 목사님 말씀 중 한 부분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어떤 직분을 받는 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고민이 많아진다.

 

직위나 위치에 전혀 관심 없었던 나는 양가감정이 있다. 위치에서의 그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가 중하다. 교회에서 특히 개신교 평신도 공동체라는 공간에서 집사, 권사, 장로 하는 위치 또한 그 안의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고 믿는다. 잘 모르는 위치를 탐하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나이가 들어서 받는 임직이나 역설적으로 하지 않는 다고 하는 것은 그에 맞는 역할을 거부하겠다는 것으로도 읽힌다.

 

부르는 호칭의 의미는 복잡한 사회적 위치를 갖게 한다. 아무튼 오늘 권사가 되었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 규범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내안의 나를 보면서 쪽팔림을 크게 갖는다. 그럼에도 베드로가 그랬듯이 예수님 처음 만나서 나에게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하면서도 결국 배를 버리고 예수님 따라 나섰듯이 못나고 부족하고 쪽팔리는 인생 살지만 그래도 따라는 가 보련다. 하루가 길었다. 아버님 떠난 날이었고 저녁에 추도예배 말씀 전하면서도 생각이 너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