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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활동/청소년자치공간_달그락달그락

지역사회에서 청소년활동가의 역할

by 달그락달그락 2010. 6. 18.

글의 이유

청소년과 관련한 주제로 여러 곳에서 강의했다. 청소년지도론, 복지, 문화론, 프로그램기획과 실천, 의사소통론, 교사교육, 교육복지네트워크, 부모교육 등과 함께 기관에 돈이 필요하면 기업에서 요구하는 강의도 마다하지 않았다. 현재 지역일과 법인 관련 일에 더불어 작년부터 시작한 또 다른 공부 때문에 시간이 여의치 않아 작년후반기부터 외부 강의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근래 우연찮게도 대학생들과 예비 청소년지도사 들을 위한 강의 요청이 있었다. 근래 '청년'들의 '진로'라는 말에 적극 참여하게 됐다. 본 원고는 청소년지도, 복지, 상담,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고자 하는 대학생들과 청년들을 위해 쓰여졌다.

진로와 관련한 전문가들이 많다. 직업을 어떻게 선정해야 하고, 어떤 스팩을 구축해야 하며, 미래 직업으로서의 역할 등 구체적 사안에 설명해 줄 사람들은 많아 보인다. 나와 같은 지역의 청소년활동가가 스팩이나 미래 직업 전망 등과 관련한 비슷한 류의 이야기를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양한 자격증이나 어학능력도 필요는 하나 개인적으로 이러한 류의 스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청소년에 대한 가치지향적 삶이라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지역의 청소년사업을 행하는 입장에서 몇 가지 주요한 경험을 바탕으로 향후 지역운동차원에서 어떻게 직업적 개념으로 접근해야 할지에 대해 서술하고자 했다. 마지막으로 청소년사업(Youth community work)을 자기의 업으로 삼을 청년들에게 대학생 기간 동안 준비해야할 일들을 '개인적 관점'으로서 당부하고자 하는 몇 가지 사안을 정리해 보았다.

원고에 개인적 관점에 따른 짧은 경험을 밝힌 이유는 경험한 청소년사업이 본 원고의 근거와 이유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당연히 밝혀야 하는 과정이라고 인지했다. 미래에 청소년지도사, 상담사, 사회복지사, 교사 등을 꿈꾸는 분들은 참고 사례로서의 역할만을 갖기를 바란다. 순수한 현장에서의 활동과 나름의 학습을 통한 주관적 관점이기 때문이다.

 

내가 청소년전문가인가?

청소년에 관한 일을 행한다. 직업이라고 표현하는데 정확히 구분지어 이름 지을 수 있는 명칭이 부자연스럽다. 지역사회에서 청소년들이 '자신의 삶의 주체로서 성장할 수 있는 다양한 일을 행하는 활동가'인데 이러한 일을 표현하는 직업적 단어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운영하는 기관자체도 그러한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지 '관장'이라는 직함이 나의 일을 모두 표현하지 않는다고 보여진다.

청소년에 대한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며 주변에서 수시로 관련 자문을 요청한다. 청소년전문가라는 용어를 부여하며 요청하는 여러 일들을 대할 때면 부끄럽고 무안 했던 적이 많다. 전문적 식견이 어느 정도인지 가름하지 못했고 개인적 수준이 '전문가'라는 호칭 달며 소통하려니 어색하고 무안했기 때문이다. 일의 전문성이 무엇인가 고민 했었다. 사회에서 어떤 분야의 전문성이라 함은 다른 이들에 비해 그 분야만큼은 매우 뛰어난 어떤 능력이 있어야 한다. 내가 만난 수 많은 청소년들과 지역민들이 속한 사회의 긍정적 변화를 나름의 노력으로 잘 해결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내 자신을 개인적으로 평가해 보건데 결코 월등하게 많은 변화를 이루었다고 측정하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어떤 이들의 관점으로는 수 많은 일들을 진행했다고 볼 수도 있으나 다른 관점으로 보면 내가 행한 일이 도대체 무엇인지 고민이 될 때가 많았다. 나 자신에게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했던 적도 있었다. 그 일은 지금도 계속된다.

 

청소년관련 일들의 종류

청소년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많은 일들이 있다. '활동', '상담', '복지', '교육'이라는 단어 앞에 청소년이 들어간다. 국가 정책적으로 만들어지다 보니 용어를 구체화 시키려 노력을 기울인 모양이다. 과거 학교 밖 청소년사업은 청소년단체에서 주를 이루었다. 90년대 초 청소년기본법이 완비되며 지자체마다 청소년수련관, 청소년문화의집, 청소년문화센터 등 다양한 청소년활동시설을 보급하며 활동공간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청소년상담실이 확대되어 청소년지원센터로 청소년자원봉사센터가 활동진흥센터가 되었고, 사회복지관이나 지역아동센터 등의 관련 복지기관들에서도 청소년사업은 지속 되었다. 학교사회사업으로 학교에 사회복지사를 집중하려는 움직임도 보았고, 근래에는 교육복지사업이 교육부 차원에서도 진행 중이다.

청소년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고 볼 수 있는 학교 교육이 존재한다. 현재 우리사회에서 학교는 대다수의 청소년들이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지만 공교육의 문제는 갈수록 심화되는 양상이다. 사교육의 폐해라고 강조하는 학원이라는 공간도 아이들이 많은 시간을 보내는 환경이다. 이에 반해 대안학교 등의 다양한 교육기관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와 함께 청소년과 관련된 일들은 무수히 많아 보인다.

 

직업의 위치를 잡아볼까?

이렇듯 다양한 청소년관련 일 가운데에서 나만의 위치를 잡아 보려니 복잡해진다. 단순히 어느 고등학교 교사 하면 그 사람의 위치가 매우 쉽게 파악이 되지만 개인적으로 지역사회에서 여러 일들에 개입을 하고 있기에 어느 한 분야의 정확한 위치를 잡아 낸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브랜드, 포지셔닝 운운하며 과거 상품에 붙여왔던 용어들이 어느 순간 개인의 역할에 대한 부분으로까지 넘어 오며 자기 전문성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어 왔다. 기업의 상품가치의 위치를 잡아 내는 일처럼 우리내 일의 위치를 바로 잡아내는 게 쉽지는 않아 보인다. 그 '일'이 일만으로 관계되어진 게 아닌 '사람'과 관계되어진 것이기에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아이들을 만나면 대부분 첫 번째 해야 할 일은 대화이다. 면담이라고도 칭하며 조금 깊은 이야기 주고 받게 되면 상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랬구나?", "저랬구나"라는 단어 써 가며 청소년상담학, 심리학 등 공부한데로 공감하는 척 하기도 했다. 상담사로서의 어떠한 권위를 가지고 만나는 것도 어색하기만 하다. 수많은 아이들을 만나왔지만 이러한 용어를 쓰기보다는 일상의 평범하고 좋은 선생, YMCA의 간사로 만나왔다. 이 또한 아이들이 정하기에 나름인 호칭이 사용되었다. 선생이라는 호칭이 일반적이었으나 학교교사를 싫어하는 아이들은 간사라는 호칭을 주로 사용했고 기관에서의 관장, 부장 등의 호칭을 사용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청소년활동'한다며 프로그램 기획, 개발이라는 용어 써가며 시간과 환경에 꿰어 맞추어 프로그램을 진행해 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시설, 기관에서의 프로그램 중심의 운영보다 주로 했던 일은 청소년동아리 자치조직을 먼저 양성하고 그들 안에서 과정을 중시하는 사업들을 만들어 왔다. 이러한 청소년조직 안에서의 일들이 주 사업이 되었고 그 이외에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지역의 청소년이나 학교 내에서 필요하다 판단될 때 사업을 개발하고 지원해 왔다. 이러한 일반적인 만남도 존재하나 전혀 예상치 못한 환경에서의 만남도 존재한다.

기관이나 단체에서 여러 경로의 일반적인 참여로 인한 관계와 함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만남들도 많았던 것 같다. 근래 공부하고 있는 비형식교육(informal education)의 전형적인 예로 비추어지기도 한다. 예전 사무실은 개방해서 아이들의 휴게실 비슷하게 활용했던 적이 있었다. 짧은 시간의 만남에서 얻는 소중한 관계가 좋았다. 그 안에서 아이들과의 수 많은 관계가 형성되어 갔다. 지나쳐 가며 던진 말 한마디, 가끔씩 진지하게 아이들과 진로에 대한 개인적 소견을 말해 주기도 했다. 동아리활동하며 친구간의 관계, 부모, 교사와의 관계에서 오는 힘겨움을 들어 주며 나름의 조언도 했다. 찾아가서 하기 보다는 아이들이 자연스레 찾아 오는 형국이어서 관계형성이 자연스러웠다. 사회복지나 상담에서 이야기하는 클라이언트라는 용어로 어떠한 대상적 개념이 아니었다. 수련관 등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의 수강생도 아니었다. 어떤 특별한 관계가 아닌 그저 그들이 찾아오고 만나는 일상의 관계였다. 친구들을 데려오면 회원이 되기도 하고 잠시 머물러 있기도 했다. 이러한 다양한 관계의 접점 안에서 활동에 참여하는 아이들의 진로가 결정되어지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었다. 청소년 축제에 참여하며 댄스 동아리 아이들이 춤을 추는 것을 보며 너무나 좋아했던 아이가 있었다. 춤추는 오빠들 좋다며 기관에 와서 동아리에 가입하고 자신도 친구들과 동아리를 만들어 수년간을 함께 했다. 부모님 이혼하고 방황하다가 친구 따라 단체에서 활동하며 어려웠던 청소년기를 잘 이겨내고 성장한 아이도 있다. 대상에 따라서도 다르게 만나고 관계한다. 집안의 경제적 환경이 너무 부유해서 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을 하지 않고 나오는 아이들도 있다. 방과후 사업 시작하면서 만나는 아이들은 또 다르다. 문화활동 좋아서 여러 동아리활동에 매몰되는 아이들도 있다. 이런저런 내용 모르고 친구 따라 왔다가 동아리연합회 임원이 되며 다른 세상을 경험했다며 사회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키우는 아이들도 있었다. 학교에 특강 갔다가 만난 아이들과 수년째 관계하던 일도 있었다. 참여한 아이를 중심으로 학생회연합회도 구성했었다. 청소년인권의 실제적 문제를 지속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순수한 민간의 힘으로 청소년인권센터를 개소했다. 단편적 생각만으로도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다양한 일들이 스치고 지나간다. 앞에서 서술했던 단순한 몇 문장의 글들로 진행하는 일들을 정리하기에는 이미 불가능해 보인다.

행하는 일들 가운데에서 상담, 교육, 활동, 복지 등의 다양한 용어를 써 가며 사람을 만나고 그 일만을 행할 수 있는 전문성을 찾아 낸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단순히 상담한다며 몇 차례 대면하여 대화한다고 해서 당사자인 청소년의 문제가 해결 될 수 있을까? 수 없이 많은 아이들을 만나고 청소년과 관계된 지역사회 정책과 다양한 사안을 위해 관련 전문가 집단과 지역의 시민들과 끊임없이 관계했다. 개인적으로 공부한 분야도 나름의 상담심리, 사회복지실천기술론, 의사소통론, 청소년지도론, 교육학, 거기에 근래에는 비형식교육(Informal education)의 대화(conversation)방법까지 꽤 열심히 공부했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개인적 경험으로 아이들의 삶과 그들의 환경 자체를 긍정적으로 완전히 변화시킨 예가 있었나? 완전, 완벽이라는 단어의 애매함이 존재하기에 더욱 확신하지 못한다.

활동은 또 어떤가? 청소년지도자론, 수련활동론 뿐만 아니라 이벤트학원론, 프로그램기획실천 등 몇 가지 주요한 체계에 대한 학습이 있었다. 개인적 학습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어줍잖은 강의까지 하고 있다. 청소년들의 동아리 공간을 만들어 주려 노력했고 나름의 어설픈 지도자 역할을 해왔다. 일 년에 진행하는 축제만 매년 10회 이상이었으니 지금 기억만으로도 청소년 관련 축제를 기획하고 진행한 것만 해도 100회는 족히 넘는 것 같다. 캠프, 문화프로그램, 진로프로그램 등 프로그램이라고 들어가는 수많은 내용들을 포함하면 한정된 기억으로 셀 수도 없을 정도로 행했었다. 그 안에서 아이들의 변화를 조금이나마 이해 할 수 있는 단계까지는 왔으나 어떠한 단편적 프로그램 때문에 삶이 긍정적으로 완전하게 변화했다고는 인식하지 않는다. 다만 전환의 계기, 변화의 시작, 인생의 작은 터닝포인트 정도의 지점을 주었던 경험은 있었던 것 같다.

청소년복지사업이라며 상처 입고 약한 아이들과 만나서 지역과 연결시켜 주려 많은 일들 벌이기도 했다. 대학생, 법인 이사, 위원에 선후배 동원하고, 교회 성도 분들에게 까지 연결해 보려 했고, 간혹 있는 일이지만 아이들의 부모를 일부러 만나 아이에게 그렇게 대하지 말라고 사정해 보기도 하고 화도 내 보았다. 그래서 엄청난 결과가 있었나? 지역아동청소년복지관련 네트워크 만들기 위해 몇 년간 네트워킹 사업과 조직사업 했었고 결국은 실무자연대도 조직했다. 하지만 처음 의도했던 대로의 성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어떠한 기계를 조작하고 만들어 가거나 상품을 생산해 내듯이 정확한 원칙과 투여되는 시간에 따라 어느 정도의 기대효과가 나올 수 없는 일임을 알게 된다.

 

좋아하는 일은 무엇인가?

청소년들을 만나면 좋다. 그들을 중심으로 만나는 지역의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 또한 좋다. 청년들과 소통하면 전해지는 열정적인 느낌도 좋다. 10대, 20대의 청(소)년들을 만나면 가슴이 뛴다. 이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가만히 있을 수 없을 정도의 어떤 뭉클한 힘을 전해 받는다. 그들의 순수한 가슴에 미천하나마 삶의 가치를 이야기하며 실천해 가는 그 과정이 좋다. 어떠한 목적에 대한 순수한 가치를 교감하며 소통하고 상호간 배움을 통하며 경험해 가는 과정이 너무나 좋다. 다양한 곳에서 강의하며 당사자들에서 느껴지는 소통의 교감도 좋아한다. 청소년지도론, 인권, 리더십, 진로, 민주시민, 신용, 시민참여, 청소년자원봉사, 의사소통론 등의 다양한 주제로 많은 강의를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부끄러운 점이 너무 많았다. 참가자들과 교감하는 그 순간의 '감동'이 좋아서 여러 기관에서 부탁해 오면 거절하지 않고 끊임없이 행했었다. 거기에 더해 수년전부터 몇 개 대학 강의까지 하고 있다. 경험하며 학술적 이론도 깊이 있게 연구하여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참여 한 적도 있었으나 내 것이 아닌 단순한 기술론적 접근을 가지고 강단에 섰던 경험이 많다. 이론을 깊이 연구하고 체화하여 가슴으로 받아들이거나, 실제 경험하며 글을 쓰고, 그 순수한 감동을 가지고 강단에 서는 것과 단순히 머리로 알고 기술적 접근만으로 행하는 교감은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수강생들에게 미안할 때가 있다. 철저한 준비와 내 안의 끊임없는 성찰이 우선시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참여자들이 좋아하고 감동받기도 하여 나 자신에게도 많은 힘을 얻기도 했지만, 자칫 나만을 위한 시간이 된 것 같아 죄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 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어떤 개인적 이익을 얻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일을 생각해 보니 결국은 어떠한 긍정적 변화를 위해 아이들을 만나고 그들과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고, 지금까지 현장과 이론에서 얻은 미천한 지식을 나누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여러 전문인이라 칭하는 분들이 청년들의 직업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시 하며 강조하는 것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조언한다.

맞는 말일까?

응당 그렇다고 보여진다. 다만 많은 이들이 자신이 생각할 때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나 상당수 지속적으로 일하지 않는다. 하기 싫은데 행하는 일을 두말할 것도 없다. 이 보다는 자기 자신만 좋은 일이 아닌, 나도 좋고 아이들 좋은 일, 가치 있는 일, 본질에 다가갈 수 있는 일, 세상적인 기득권과 이득을 갖고 영향력을 넓히는 것이 아닌 역사에 남은 수많은 위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어떠한 사명이나 목적을 가지고 본이 되는 올바른 삶을 묵묵히 영위하는 일이었으면 좋겠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이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무얼 하나?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들을 행하고 있나?"

"내가 만난 청소년들 대부분의 삶이 긍정적 변화를 보였는가?"

"지역사회를 청소년들이 보이는 살기 좋은 공간으로의 변화가 있었는가?"

"오늘은 무엇을 했지?"

이 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를 떠올려 보았다. 이른 아침 출근해 현재 법인의 여러 문제 있었던 정관세칙 개정한 내용 정리해서 이사장님께 보내드리고, 점심에 청소년행사 회의 주관하고, 전주에 가서 교육감 후보들 모시고 진행하는 메니페스토 행사 회의 진행하고, 저녁에 이사회 참여해 세칙과 수련관운영위원회 설명 드리고 수정작업 마쳤다. 이후 법인 청소년위원회 회의에 참여했다가 몇 분의 이사님과 11시가 넘어서 까지 여러 논의 했다. 귀가한 후 밀린 대학원 발표할 소논문 작업 하다가 쓰러지다시피 잠이 들었다.

오늘은 무엇을 했나? 오전에 대학에 강의가 있었다. 오후에 수탁 받은 시설 인수인계 문제 검토 작업하고, 다음 주 기관 면접 논의했다. 저녁에는 YMCA서부권역(전라, 충청, 제주)의 청소년담당 간사들과 청소년회원 대표들이 여름 하령회(청소년컨퍼런스)를 위한 회의에 참여했다. 저녁식사 후 월드컵응원을 하고 새벽 2시경까지 실무간사들과 청소년회원들이 전체 회의 했다. 이후 청소년들은 잠자리에 들었고 담당 간사들은 새벽 6시 가까운 시간까지 지역상황과 청소년운동에 대한 여러 고민을 나누었다. 어제 한 일이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간다. 이러한 일들이 몇 년 째 반복되고 있다.

문제를 확인하고, 기획하고, 사람을 모으고, 대화하고, 준비하고, 실행한다. 최근 들어 행하는 일의 과정에서의 만남의 관계가 실제적 당사자인 청소년들이기 보다는 그들을 지원해야 하는 힘이 있는 성인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이 일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내 위치의 실제 하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 고민하게 한다. 근래 만나는 대부분의 연령대가 평균 50대 초 중반정도인 것 같다. 6~70대 어른들도 계신다. 다양한 측면에서 논의하고 청소년들의 장을 만드는 일과 문제가 있는 여러 일들을 크게 해결할 수 있다. 지혜를 모으는 과정에 많은 배움과 함께 소중한 성과가 있음도 알고 있다. 이러한 일들도 하나의 전문적 관점에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나에게 맞는 것인가는 고민이다.

만나는 이들이 인정해주고 신뢰해 주니 얼굴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부끄럽고 부담스러울 때도 많다. 현재 주로 행하는 이러한 정치적 일들, 법인의 문제, 지역사회의 정책적 사안 등을 해결하려 하고 중재하며 행해야 하는 일의 자리가 내가 행해야만 하는 자리인지는 아직까지도 정확하지 않다. 가치도 있고 나이 있는 여러 어른들을 만나고 소통하며 많은 것을 깨닫기는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고착화 되었을 때의 내 모습을 그려보니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떤 기관의 '장'자 들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보수화되어 그 곳에 안주하는 편안함에 취할 것 같아 두렵기도 하다. 조직의 힘을 알고 있기에 그 안에서의 정치적 논리를 잘 따르고 본질을 추구하기 보다는 형식에 치우쳐 그러한 일들에 매몰 되어 안정되게 먹고사는 것에 취할 것만 같아서 더욱 두렵다.

한달여 전 지역의 모 복지기관 관장과 이야기 나눌 자리가 있었다. 그 분이 어제 기관에서 일하는 수급자 분들과 어려운 분들의 집을 수리해 주는 일을 함께 한다며 자랑했다. 그러면서 내가 하는 공부와 그 일에 대한 가치가 있지만, 자신도 가난하고 약한 이들과 땀 흘리며 함께 봉사하면서 소중한 가치를 갖게 된다고 했다. 어찌 보면 맞는 말이나 그 분이 그러한 말을 하면 안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봉사자들과 어려운 분의 집에 찾아가 집 고쳐 주는 일을 거들었다며 그 일의 가치를 논한다. 자원봉사자들은 그 안에서 땀 흘리며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행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한 기관의 장이라면 그러한 자리에 직접 가서 한두 시간 땀 흘리며 도와주었다고 자랑할게 아니다. 가끔 외식하듯이 몇 시간 허용을 통해 복지대상자분들과 땀 한번 흘린 일들이 가장 큰 자랑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모순이다. 관장님은 한 두번 그 분들과 땀흘리는 것을 자랑할게 아니고 어려운 당사자분들이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장'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결국에는 지역사회에 그렇게 힘들게 거주하는 분들의 전체적 변화까지고 고민하고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 했다. 자기 위치와 자기 권한과 자기 책임을 망각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전문성이 될 수 없다. 어느 위치나 그 위치에 따른 책임과 권한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권한을 크게 가지고 있으며 그에 대한 보상은 받으면서 책임은 지려 하지 않고서 누구나 행할 수 있는 작은 일들에 감사한다든 것은 상대를 우롱하는 것으로 보인다. 차라리 그러한 자리를 갖지 말고 단순하게 수급권자들이 행하는 그러한 일들만 행할 수 있는 자리로 가야 한다는 게 개인적 지론이다.

여러 일들에 대한 나름의 책임을 진다며 바쁘게 살아가지만 정작 변화는 작아 보인다. 어떠한 일을 해결해 가는 과정의 시간도 갈수록 길어진다. 그 긴 시간 안에 해결해야 하는 무수한 일들 가운데 커다란 규모의 일들이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결국 그 일의 본질에 이르기에는 쉽지 않아 보인다. 깊이 사고하고 분석하고 행하고자 하지만 고민점만 커질 뿐 환경의 변화는 참으로 미천해 보인다.

 

내가 즐거워 하는 일은 무엇인가?

청(소)년들과 함께 호흡하고 서로간의 역동성을 부여하며 변화를 체험하는 일이 좋다. 함께 변화를 체험한다는 것은 곧 나의 변화이다. 많은 책과 함께 만나는 여러 어른들에게도 배운 게 많지만, 청소년들에게 배운 것이 더 많아 보인다. 이 일을 시작한 초기 청소년들을 만나며 가르치는 자리가 주요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관계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가르치는 자리와 가르침 받는 자리가 항상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르침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 또한 알았다. 근래에는 나이 많은 어른들이 학생이 되어 나에게 선생, 교수라는 여러 직함을 부여하며 깍듯하게 대해 주고 부족한 자의 언변에 감동해 하며 감사해 하는 그 겸손이 오히려 나를 더욱 부끄럽게 하며 낮아지게 한다. 가끔씩 써 내려간 글 안에 못난 교만이 보이기도 한다. 나의 자랑과 교만함이 묻어 나온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짓이다. 내 안의 못난 자아를 내 자신이 너무도 잘 아는데 이러한 글을 자꾸만 써내려 가는 웃기지도 않은 내 가슴을 들여다 볼 때면 심각한 자괴감이 몰려 올 때도 있다. 글을 보면서 어떤 분들은 나에게 겸손하다 이야기 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의 못나기만 한 부족한 자아가 이끌어 낸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더 낮아져야 한다. 낮아진다는 표현도 우습다. 그 자리가 내 자리이기에 당연히 그 곳에 바짝 엎드려 하늘을 보아야 한다. 청소년들과 청년들을 올려다 보아야 한다. 시민들을 올려다 보아야 한다.

 

집중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

정상인과 비정상인을 구분 짓는 정신의학적 과정가운데 책임이라는 영역이 있다. 조금 거칠게 표현하면 자신의 일에 책임을 지려 하는 사람들이 정상인이고 그렇지 않은 이들이 비정상인이라고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조차 지려 하지 않는 이들이 현대 사회의 공동체 안에서 정상인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의 책임은 여러 관점에서 인지할 수 있다. 실제 정신과 치료를 받는 책임의 문제도 존재하나 사회적 부와 명성은 가지고 있으나 그에 따르는 사회적 책임을 방기한 사람들도 존재한다. 어떤 기능을 뛰어나게 잘해서 청소년에 대한 일을 행하며 전문가라 칭하기보다는 다른 이들에 비해 조금 더 많은 책임을 지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중요하지 않을까? '청소년전문가'라는 단어를 호칭하기에도 왠지 부적절해 보인다. 한 아이에 대한 책임을 지려 하기에 마땅한 그 어떤 목적을 향해 낳아 가는 일을 당연시해야 하지 않을까?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어떤 부름에 응답일수도 있겠다. 영문을 보니 응답과 능력의 합성어가 책임이다. 우리는 어떠한 응답 또는 반응을 아이들에게 보이는가? 그 응답에 대한 능력을 어디까지 발휘했나?

사람답게 사는 개인적 관점이 중요해 보인다. 그러한 복된 삶에 대한 가치를 이해하고 받아 들일 때에 집중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 있다. 인간의 권리에 대해서도 여러 고민이 있어 왔다. 근래에는 시민성에 대해 학습하고 실천적 기반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인권, 시민성, 평화, 자유, 평등, 정의 등의 다양한 가치의 중요한 맥락을 찾아 보니 결국은 자기 자신이 속한 환경에 대한 책임과 권한을 갖는 것으로 이해했다. 인권에서도 자기 자신의 권리와 타인의 권리가 공존해야 했고, 자율과 평등 또한 상충되나 공존한다. 다만 평등하여 자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평화를 이루기 위해 사랑과 함께 정의가 반드시 존재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 약한 아이들을 나누어 복지시스템에 맞추어 더욱 힘겹게 하는 사회체계를 조금이나마 이해 할 수 있었다.

여러 용어의 정의로 이야기 할 수 있겠으나 개인적인 시각으로 접근해 보건데 결국은 자기 주도성과 공동체성의 발현이었다. 시민성(citizenship)의 정의인 자기 자신이 인식한 환경에 대한 책임과 권한을 갖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개인의 책임지려는 공간의 크기에 따라 수많은 일들이 변화할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지구촌시민성에 대해 고민하다 보니 전지구의 공동체 안에서의 우리 아이들과 나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권한과 책임의 적절성에 대한 고민이 있겠으나 존경하는 분들의 삶을 보니 권한보다는 더 많은 책임을 가지려는 분들이 많았다.

내가 가진 책임은 어디까지일까? 권한은 또 얼만큼인가? 권한이 없으면 책임지면 안되는가? 권한이 있음에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기에 문제가 발생하지 책임을 확대한다고 해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는 많지 않아 보인다. 자신의 권한 이상을 책임지려 하는 사람은 많은 힘겨움이 존재한다. 과정에 따라 자기 전문성이 성장하는 비율이 책임성의 크기에 따라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철학전 논쟁을 취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내재적 가치는 기본적으로 어떠한 일의 본질과 자율성에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이와 달리 외재적 가치는 수단과 타율에 깊게 관련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근래 본질적으로 '자기 소유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하신 어른을 책에서 만났다.

자기 소유란 한평생 살아가면서 청지기로서 잠시 맡아 둘 뿐이지 그 이상의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해했다. 육체의 욕심은 끝간 데 없으나 결국은 그 육신도 우리 삶이 언젠가 다할 때 썩어 없어질 것이다. 그 육신에서 떠나가는 그 어떤 마음(mind)과 영(spirit)이 행하는 데로 움직여 가야 하는 것이 우리 존재가치가 살아서 움직이는 이유임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환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온전히 육체의 욕심을 잘 채우는 것이 웰빙(wellbeing)하는 거라며 큰 집에 큰 차를 타라며 끊임없이 강요하며 머리에 주입한다. 육신이 원하는 일들을 정신과 영이 하도록 한다. 철저히 외재적 가치에 몰두해 살아 갈 수 밖에 없는 환경이다.

집중해야 하는 책임이다. 어떻게 아이들을 책임지고, 어떻게 지역사회를 책임질 것인지 자신안의 환경에서 자세히 들여다 보아여 한다. 아이들이 자기주도적 삶을 살며, 평등한 환경의 자율을 맛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의롭고 사랑이 넘치는 환경을 만들도록 해야 한다. 최소한 나와의 관계에서의 공간은 이러한 환경이 이루어지도록 집중해야 한다.

한 아이를 책임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힘겨운 일인가를 깨닫는 것은 이 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철저히 깨닫게 되었다. 나의 무능함도 알게 되었고 위치 또한 이해하게 되었다. 진실로 한사람을 책임지고 관계한다는 것의 힘겨움과 개인적으로 꿈꾸었던 이상과 실제적 일에 대한 괴리감,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쉽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그래서 예비 청소년지도자들에게 부탁드린다.

먼저는 청소년지도자로서의 자기 가치(철학, 이념)를 가졌으면 좋겠다.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남을 비판하거나 어떠한 자기 이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앎' 자체를 실천하기 위해서이다. 이를 위한 책을 통한 학습과 수많은 스승들과의 깊은 관계는 필수적이다.

둘째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 자기 자신의 성찰하는 만큼만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출 수 있다. 성찰의 근본은 사랑이라 믿는다. 아이들을 사랑하는데 잘 사랑하는 방법이 성찰에 있음은 당연하다. 빈곤의 심리에서 누가 얼만큼 갖고 그것을 쟁취하는 과정이 아닌 어떻게 하면 사람이 사람답게 공생하며 살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사람이 자연과 신과 세상과 공존하며 살 수 있는지에 대한 끊임 없는 자기 성찰에 대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손해나 이득의 수준이 아닌 가치지향적인 '본'이 되는 삶을 추구하라는 것과 맥이 같은 내용이다. 많은 이들이 자기 자신의 인간관계에서의 이득을 위하여 주고받는 행위를 조금 더 이타적으로 행하라고 충고한다. 그 수준이 아니다. 예를 들어 다수가 강요하거나 의결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약자인 소수가 힘겨워 하면 저항해야 함을 뜻한다. 어떠한 개인적 명분과 이기심을 채우고자 자기 자신의 것을 조금 더 내어 놓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행해야 하는 근본적 일들은 본이 되는 본질적 삶에 있음을 간과하지 말자. 강자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약자를 보호하고 지원하여 주도적인 삶이 되도록 하는 것, 먹고 마시는데에만 맹목적으로 매달리지 말고 왜 존재해야 하는지, 인간적인 평화로운 삶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사고하는 삶을 뜻한다.

셋째로 게으름은 죄라는 것을 철저히 인식했으면 좋겠다. 자신이 누리는 시간의 엄정한 평가는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대학생 초기 고교시절과 달리 자칫 시간을 잘못 활용하게 되면 게으름의 극치를 보여주는 예는 수없이 많다. 고통하지 않고 육체적 안위만을 쫓다가 몰락하는 수많은 이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다. 여름 휴가에 계곡을 가보면 하류로 내려 갈수록 물은 더러울 수 밖에 없다. 연어가 힘겹고 고통스럽지만 물살을 헤치고 계곡을 올라가 결국은 산란하지 않는가. 쇼펜하우어가 말하듯이 강을 거슬러 헤엄치는 사람만이 물결의 세기를 알 수 있다. 인간의 육체는 나태할 수록 타락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고 있다. 우리가 최소한 청소년들을 만나는 지도자, 활동가, 교사, 상담사, 복지사 등으로 불리고 싶다면 긍정적 가치를 위한 부지런함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지 않을까?

넷째로 끊임없이 학습했으면 좋겠다. 학습이란 독서만을 뜻하지 않는다. 책과 함께 운동과 학습의 동역자들과의 지속적인 관계가 있어야 한다. 책에서 존경하는 많은 분들을 만나왔다. 이와 함께 자신이 배우고 활동하며 성찰한 내용들을 여러 경로를 통해 알리고 다시금 피드백 받으며 다시 다듬어 내는 귀한 가르침과 자기 성찰만큼 기쁜 일을 찾기가 어렵다. 행하는 사업에 대한 성장은 매우 중요한 과정임에 분명하다. 자격증을 위해서가 아닌 자기 삶의 긍정적 실현을 위해서 지속적 학습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섯째로 말을 가려서해야 한다. 말한 대로 된다. 특히 청소년들과의 대화는 주의하여 상대를 이해하고 지지하려 애썼으면 좋겠다. 긍정성은 삶을 변화시키는 매우 큰 원동력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추구하는 자기비전과 고민에 따라 이야기하는 '말'은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말한 데로 된다. 특히 그 말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큰 무기이기도 하다. 청소년들과 관계하며 자기 자신이 어떠한 말들을 소통하는지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좋은 선생에 좋은 제자가 만들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 아닌가!

마지막으로 현재의 자신의 고통이 무엇 때문인지 자세히 분석해보라. 고통의 이유는 자기 성장의 도구이다. 문제를 정의내리는 다양한 기준이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자기 문제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이 의도했거나 생각했던 내용과 현실이 차이가 있을 때 문제가 있다고 여긴다. 주목할 부분은 자신이 의도했거나 생각했던 바로 그 내용이다. 현실에는 철저히 나태하고 교만에 빠져 있음에도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부와 명예의 충족만을 그린다면 과연 그가 행복할까? 청소년사업 가운데 사회복지나 청소년지도학 관련해서 가장 많이 지원을 하는 분야가 '상담'분야로 알려졌다. 이유는 단순하다. 안정적인 연봉과 일자리, 그리고 세상적으로도 인정받는 조금은 편안한 전문직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자기 연민에 빠져 자기 자신을 자세히 드려다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청소년들을 만나면 어떻게 그렇게 지시하고 강압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지도자들을 보아왔다. 고통은 자기 자신을 키우는 매우 큰 도구임을 잊지 말자. 다만 그 고통의 근본적 이유가 현재의 자기 모습은 전혀 고려치 않은 채 육신의 안녕만을 그리는 내용이라면 여기에서 뜻하는 고통이 아니다.

 

나가며

강의와 원고를 의뢰받았을 때 담당 선생님께서 지역 활동 중심으로 예비 청소년지도사들에게 전해 줄 수 있는 내용이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한 달 전 지역의 모 대학 특강 가기 전에 작성하려고 준비했던 글을 꺼냈다. 여전히 내용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버스에서 이동하며 간단히 메모한 내용과 과거 자료를 취합해 청년들에게 강의했기 때문에 그 당시 원고는 의미가 없었다. 중앙청소년수련원에서 의뢰 받은 후 청년들에게 지역의 청소년운동 차원에서 어떻게 접근할지 고민을 했지만 시간적 한계를 넘지 못하고 이삼일 늦은 밤에 작성한 수준에서 글을 쓰고 말았다.

글을 쓰며 나의 대학생활을 떠 올렸다. 고교졸업 후 대학이 의미 없다는 어줍잖은 핑계와 집안 형편을 이야기하며 20살 어린나이에 군인이 되었다. 이년여 만에 제대하고 먹고살기 위해서는 대학에 가야 한다는 주변의 권유로 대학에 입학했다. 자격증도 취득하고 대학에서 누릴 수 있는 여러 즐거움을 누리려 했던 것 같다. 결국 졸업을 얼마 남기지 않고 취업했으나 일년도 안되서 사직하고 말았다. 누구나 좋은 직장이라 여겼지만 그 안의 일은 나에게 만큼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러한 시간에 아이들을 만났다. 청소년운동이라는 것을 조금씩 이해했고, 다시 관련 공부를 시작했다. 보잘 것 없지만 현재의 이정도의 모습까지 되기에도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청소년들을 만나며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성으로서의 사랑이 아닌 일반의 삶에 대한 사랑이다. 아이들을 만나고 세상을 보는 눈을 다시 키우게 되었다. 가슴 뛰는 일이 아닌, 가슴 뛰게 하는 생명을 만난 것이다. 생명이 평화롭기 위해서 많은 고민을 했고 미친 듯이 일도 했고 책도 봤고 사람도 만났다. 나에게 지역에서의 청소년활동에 대한 일들이 직업적 수준에서 머물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삶의 주요한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대학생, 청년들이 있다면 한 가지만 기억했으면 좋겠다. "자기 자신을 통해 한명의 청소년이라도 삶의 가치를 깨닫고 올바른 삶을 살아간다면 이만큼 가치 있는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하는 것이다.

 

 http://www.youthauto.net/zboard/view.php?id=example&no=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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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청소년수련관의 의뢰로 2010년 6월18일 예비 청소년지도사들을 대상으로 "지역사회 리더로서의 청소년지도사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의뢰받았습니다. 제목을 지역사회청소년활동가의 역할로 수정해서 작성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