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며 가끔 내 안의 본질을 살펴보게 됩니다.
마음과 몸이 피곤해 있을 때 내가 가진 것과 행하는 일에 대해
남과 비교하며 나를 바라보곤 합니다.
일 자체가 어떤 영리적 목적의 삶이 아니라고 단정하고
사회와는 다른 이상적 목적을 세워 움직인다고 하면서도
자꾸만 조직 내부와 밖의 다른 모습 들에 의해
비교하며 힘겨워 하는 저를 보게 됩니다.
이럴 때 본질에서 가끔씩 멀어지는 시작임을 감지하게 됩니다.
이런 시간일 때 더욱 나를 다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저에겐 작은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싸이질을 하다가 레온 플라이셔의 활동 내용을 알게 되었습니다.
워낙 음악에는 무지한 지라 이 분의 사진만 가끔 보았지 이러한 삶의
굴곡 안에서 멋진 인생을 사신 분이라는 것은 몰랐습니다.
가장 힘겨운 고난을 가장 큰 기회로 여기며 살아 더 큰 거장의 반열에 올라 서신 분입니다.
조금이라도 어려운 일을 당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두 가지 부류로 극명하게 나뉘게 됩니다.
힘겨움에 둘러 싸여 낙심하며 주저앉는 부류와 함께
그 일을 기회로 여기며 더욱 열심히 도전하고 기도하며 나아가는 분들이십니다.
어떠한 일에서건 기회는 선택입니다.
그 선택은 자기 자신이 합니다.
내일 새로운 월요일의 시작입니다.
그 새로운 기회를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지금 선택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레온 플라이셔는 누구?]
‘왼손의
거장’ 레온 플라이셔(77)가 두 손 연주로 한국을 찾는다. 레온 플라이셔는 30대 중반에 오른손 마비가 찾아온 뒤 왼손으로 피아노를 쳤던
의지의 피아니스트다. 오른손 마비 이후 그는 지휘자, 이론가, 교육자로 더욱 왕성히 활동하며 진정한 거장으로 거듭났다.
40년간
지속적인 치료와 노력을 거듭하면서 오른손을 조금씩 회복한 그는 지난해 음반 ‘투 핸즈(Two Hands)’를 발표했다. 여느 연주자라면 은퇴할
나이에 되찾은 두 손으로 새로운 음악 인생을 연 그의 모습은 큰 감동을 안긴다. 다음달 1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펼쳐지는 첫 내한
무대에서는 그의 양손을 만날 수 있다.
젊은 시절 플라이셔는 승승장구했다. 192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그는 4세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9세에 당대의 거장 아르투어 슈나벨의 애제자가 됐고, 16세인 44년 뉴욕필하모닉과 협연하면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52년 미국인 최초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우승하며 세계에 이름을 알린 이후 피아니스트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병마가 찾아온
것은 64∼65년. 오른손 손가락이 손바닥 안쪽으로 고부라져 펴지지 않는 근육긴장이상증이었다. 그러나 시련은 레온 플라이셔를 더욱 단련시켰다.
그는 건강한 왼손으로 연주를 계속했고, 70년부터 지휘를 시작했다. 오른손 마비를 극복하기 위한 연주법과 음악 이론으로도 인정받았다. 피바디
음대, 커티스 음악원, 토론토 왕립음악원 등에서 가르친 그는 전 세계에 제자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수정, 이대욱, 강충모 등도 그의
제자다.
때때로 증세가 호전될 때면 양 손으로 연주하기도 했다. 82년 볼티모어 심포니오케스트라와 협연한 프랑크의 ‘심포니를 위한
변주곡’은 ‘17년 만의 재기’로 여겨지며 음악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심리적 압박감 탓이었는지 그의 오른손은 다시 마비됐다.
플라이셔가 기적적으로 회복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년 전이다.
이번 무대에서는 바흐 칸타타 중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다이나 코스턴 ‘메시지’, 조지 펄 ‘왼손을 위한 연주곡’, 레온 커슈너 ‘왼손을 위하여’, 로저 세션스 ‘나의 일기’ 중 4곡, 브람스
‘왼손을 위한 샤콘’,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B플랫장조’ 등을 연주한다. 고전과 현대음악, 왼손과 양 손 연주를 넘나든다. 펄과 커슈너의
곡은 플라이셔를 위해 쓰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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