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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영화와 책

‘군체’가 던진 소통의 착각: 완벽한 소통이라는 파국

by 달그락달그락 2026. 5. 26.

어제 저녁 큰아이가 영화 보고 싶다고 해서 조조할인 표를 예매 했다. 국가에서 주는 무슨 지원금이 있다고 했다. 영화가 5천원이 됐다.

 

 

군체는 케이 좀비 그대로 속도가 빨랐다. 40대 중반의 전지현은 여전히 한 미모 하면서, 소림사 스님들 무술 하는 듯이 빠르게 움직이는 좀비와 혈투를 벌이면서도 머리칼은 엘라스틴 했고, 피부는 계속해서 화사했다. 어제는 모자무싸, 오늘은 군체로 만난 구교환은 다른 사람인 줄 알았고, 고수는 여전히 잘 생겼다. 여고에 다니는 큰 아이가 "저 아저씨 왜 이렇게 잘생겼어요?" 질문했다. 그래서 "나는?" 뒤에 답변은 알아서 상상 하시고요.

 

그리고 연상호 감독이 연상호 했다. 기독교인으로 잘못된 세계관을 가진 사이비를 싫어하고, 학교폭력을 몹시 싫어하며, 가족과 살짝 연결된 신파를 좋아하는 우리 연 감독님의 작품 그대로다. , 빠른 전개와 좀비들의 압도적인 액션씬은 볼만했고, 군체라는 제목부터 주제의식, 스토리의 정합성은 좋았다.

 

혹시 영화에 빗대어 공동체에 대해 고민하고 싶은 분들만 아래 글 읽기를 바래요. 저처럼 불면증이 있는 분들은 필독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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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체가 던진 소통의 착각: 완벽한 소통이라는 파국

 

영화 평론가들은 죽으면 뭉치고 살면 흩어진다(김현수)”, “일심동체를 배격하는 각자도생 방탈출 튜토리얼(남선우)” 등의 한 문장으로 <군체>를 설명했다.

 

사람의 개별성, 소통의 부재, 불신 등에 따라 사회적 갈등이 심해진다. 인간사회가 망하는 지점에 갈등이 있고, 그 갈등의 정점에 소통의 부재가 있다는 게 정설이다.

 

청소년활동을 오래 하면서 인간관계에 따른 문제 해결의 중요성에 의사소통이 너무 중요하다고 하여 오래전이지만 이 분야에 나름 열심을 냈었다. 의사소통 기술을 강의하러 다니면서 알게 된 것은 그 기술을 배운다고 해서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군체(群體)는 많은 개체가 모여 하나의 집단처럼 이루어진 것을 뜻한다. 생물학적으로 같은 종의 개체들이 모여 사는 집단이고, 사회적으로는 공통된 특징이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을 말하기도 한다.

 

소통을 위해서 군체가 활성화되면 좋은 사회가 될까?

인간의 진화는 소통을 잘하는 것과 비례하는가?

 

서영철(구교환 역)은 천재 생물학자로, 인간의 모든 갈등은 의사소통의 문제로 생긴다고 여기고 모든 인간이 연결되어 통일된 생각을 하는 군체가 진화라고 믿는다.

 

소통의 부재가 낳는 비극을 막기 위해서 상대와 나를 연결한다. 타자와 연결되어 내가 상대의 모든 것을 알고, 상대 또한 나의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중심에 명령을 내리는 가장 뛰어난 리더가 있다면 사회적 고통을 막을 수 있을까?

 

연상호의 군체에서 내가 끄집어낸 질문은 여기다. 과연 인간관계의 단절과 이에 저항하는 공동체, 연대는 무엇을 뜻하는지.

 

개미 군체는 거대한 하나의 생명체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이지만, 그 안에서 명령을 내리는 절대적인 존재는 없다. 수만 마리의 일개미 개개인이 그들만의 페로몬 신호본능적인 규칙에 따라 움직이면서 군체를 만들어 낸다. 먹이를 찾은 개미가 바닥에 페로몬을 묻히며 돌아오면, 다른 개미들이 그 냄새 선을 따라 이동하는 식이다.

 

서영철의 논리라면 개미 군체가 더 진보한 공동체에 가깝지만, 서 박사는 자신을 정점의 대장으로 모든 것을 듣고 조종하는 것이 또 다른 진화라고 믿는다.

 

 

앤트 밀 알고 싶으면 이 영상 한번 보아요!

 

리더가 없이 서로의 페르몬향으로 대화를 하면서 움직이는 개미의 앤트 밀의 고통이다. 앞선 개미의 페로몬 향을 맡고서 뒤에 따르는 개미가 앞선 개미가 가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만약 한 개미가 우연히 원형으로 움직이고, 뒤의 개미들이 그 페로몬을 따라가다가 원형 흔적이 점점 강해지게 되면, 개미들은 원형으로 돌다가 탈진하여 죽어 간다. 서로가 서로를 안다고 믿고 따르다가 죽음을 맞는 형국이다. 서박사가 그래서 자신을 리더로 세웠는지는 알 수 없다.

 

공동체를 부르짖고, 공감과 연대를 강조하는 수많은 학자들이 있는데 그것의 극단화되는 일이 결국 서로의 내면까지 아는 것일 텐데 이러한 일이 결국 좋은 사회는커녕 파국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모습을 극단적인 좀비로 보여주는 듯싶다.

 

상대를 알고 공감하고, 존중하고, 인정한다는 것은 내가 상대의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이 아니었다. 상대가 알리고 싶은 것, 개방해서 알리고 싶은 것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범죄와 같이 법적인 문제가 있을 때 접근할 뿐이다.

 

공동체는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어 살아가며, 공통의 가치와 목적, 관심과 삶을 함께 나누는 집단이다. 서로의 모든 것을 공유하는 조직이 아니다. 서로를 알려고 하는 과정에 역설적으로 자유가 크게 구속되어 버린다. 단순히 사람이 많이 모였고 상대의 모든 것을 안다고 해서 공동체가 되는 것도 아니다. 종교 공동체에서 심한 경우 성생활까지 지도자에게 보고하는 경우가 있다. 반인권적인 조직이 그들만의 공동체라고 우기면서 폭력적인 관계로 변해가는 현상을 많이도 보아 왔다.

 

서로의 관계에서 일정한 소속감이나 책임감이 있으며, 함께 살아가기 위한 가치가 있고, 그 안에 서로 간 도움과 참여가 오가는 상태 정도면 족하다.

 

좋은 공동체는 상대에 대한 존중이 핵심이다. 사람은 존재 자체에 의미가 있다. 나도 존중받아야 하고 상대도 존중받는 문화가 있을 때 성립되는 관계다.

 

구성원 중에 한 사람이라도 누군가에게 수단이 될 때 공동체는 파괴될 수 있다. 모든 것을 안다는 것,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위험하다. 연결하고 싶을 때 연결하고, 알고 싶은 것을 알고 싶을 때, 내가 열고 싶을 때 열어 가는 관계의 적절성이 답이다. 그래서 우리 사는 사회는 어렵다. 조금이라도 진보하고 진화하는 일은 쉽지 않다.

 

모두가 연결과 소통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떤 방향으로 흐르는지가 중요하다. 상호 간의 관계로서 평화롭다면 이롭지만 일방적일 때, 이러한 일방성이 커질 때 폭력이 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