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에게 무엇도 바라지 않는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일 수 있다. 반대로 상대에게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참게 된다. 고개를 숙여야 하고 조금 더 나가면 약하고 비굴해진다. 타자에게 얻어야 하는 그 무엇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얻을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은 참아 낸다. 이런 일들이 생계와 관련 있으면 극단화된다.
사람들이 관계하는 모든 곳에는 자기 욕망이 있다. 무언가를 강하게 원하거나 이루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우리 모두는 욕구, 소망, 희망, 열망, 갈망, 바람, 의지, 동경, 추구, 꿈이 있는 존재다.

‘모자무싸’에서 변은아가 자신의 스웨터 안에 황동만을 넣어 포옹하면서 “같이 도망가자고 하면, 같이 도망갈 거고, 평생 숨어 살자고 하면 평생 숨어 살 거예요.”라고 하니 황동만은 “좋다”라고 조용히 되뇌인다.
이 장면이 좋았는지 며칠간 SNS에 스웨터 안에 황동만의 얼굴이 많이 보였다. 댓글에는 여전히 “제가 뭔데?”, “변은아가 왜?” 등 황동만을 비하하는 이들이 많았다. 20대 아름다운 여성이 40대 중년 무직의 찌질이(?)를 저렇게 좋아하느냐는 등의 비난 글이다.
왜 그럴까? 욕망하는 욕망이 내 것이 아닌 타자의 것이어서일까? 그들이 강해서 그 강함으로 황동만을 비난하는 것일까? 반대다. 가지고 싶어 미치겠는데 자기 것은 아닌 그녀의 사랑에 이입한 찌질이 감성이다.
나는 황동만이 부럽다. 자존감 바닥인 황동만이 하고 싶은 모든 말을 뱉으면서 살아 내는 그의 태도 때문이다. 노강식에게 출연 부탁할 때의 황동만과 그의 무례함을 만나면서 들이받았을 때는 다른 사람이 된다. 대배우 앞에서도 할 말은 모두 쏟아 낸다. 그것이 또 계약의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이후 상황은 고려하지 않는다.
질투에 못 이겨 친구도 비난하고 망하기를 바라는 부족한 사람이지만, 그의 불안과 낮은 자존감이 또 하나의 힘이 되어 사채업자에게도 당당하게 자기의 본 모습을 보이면서 들이 받는다.
‘나의 아저씨’에서 중년의 박동훈 부장은 삶의 많은 부분을 억누르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21살의 이지안에게 ‘곁’을 내어주고 새로운 삶을 살도록 돕는다. 그녀가 조금은 더 나은 삶을 사는 것 이외에 바라는 게 없어 보인다. 나의 해방일지에서도 여자친구가 죽고 알코올중독에 빠져 있는 구씨의 옆에도 그런 사랑이 찾아온다. 모자무싸에는 대놓고 찌질하지만 자기 삶에 고민도 크고 순수한 황동만의 무가치함과 싸워 가는데 가장 큰 우군이 나타난다. 자신의 무가치함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변은아다. 서로에게 바라는 것은 자기안의 욕망만이 아니다. 자신을 투영한 또 다른 사람에 대한 애정이다. 상대가 필요한 것을 함께 만들어 나간다.
타자의 욕망이 자기 욕망이 될 때 그 관계는 따뜻해지고 행복감은 커진다. 어떠한 행위를 했을 때 타자의 욕구와 희망을 돕는 일은 결국 나도 기분 좋아지게 한다.
“근데 왜 우리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 걸까?,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황동만이 삶의 회호리 가운데에서 조용히 절규하듯이 나오는 목소리가 꼭 나에게 하는 이야기 같았다.
곧 사라질 것인데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붙잡고 있는 것들이 많은지 새삼 생각이 많았다. 약자라서가 아니다. 청소년, 청년이 원하는 어떤 세상의 변화를 꿈꾸는데 그 변화를 일구기 위해서 부딪치면서 약자가 되어야 하는 상황이 너무나 많아서다. 내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기에 강자 보다는 더 낮은 약자 쪽에 붙어 있는 형국이다. 최근 선거판에서도 청소년들이 제안한 정책을 조금이라도 실현해 보려고 아등바등하는데 쉽지 않다.
나뿐인가? 우리 대부분의 삶이 그렇다. 나를 지키고 가족을 지키고 속한 회사나 조직을 지키고 지역을 지키기 위해서 만나는 이들 앞에 또 다른 약자가 되어 가는 삶이다.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그렇게 붙잡고 살아가는 삶이다.
변은아가 황동만을 안아 주면서 당신을 위해 뭐든 할 거라는 말에 “좋다”라고 조용히 읇조리는 그 음성 하나에 모든 게 녹아 있다. 나는 당신에게만큼은 강자도 약자도 아닌 존재만으로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여기에 “좋다”라고 말할 수 있는 한 사람을 아는 순간, 모두의 약함은 가치가 된다. 그런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을 때 무가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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