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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영화와 책

소년이 온다. 우리가 사람됨을 잃지 않고 산다는 것은 양심을 붙잡는 일이라는 것. 그리고 그 양심에 따라서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는 것.

by 달그락달그락 2024. 12. 25.

 

15살의 동호가 보고 싶다. 중학교 3학년의 앳된 청소년. 그 사지에서 마지막까지 시민군과 함께한 후 아프게 떠난 아이.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져 맥박치는 걸 느꼈습니다. 나를 사로잡은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계엄령에 따라 움직이며 시민들을 살육하는 군인들의 앞에 맨몸으로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소년.

 

그 양심의 표시를 따라서 계속 움직여 갔던 청소년, 청년들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아리다 못해 무너져 내리고 만다. ‘이 내린 계엄령에 의해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지 적나라해서 다시 아팠다.

 

계엄의 망령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것도 끔찍했고, 그 안에서 양심 없는 자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데 살 떨리게 싫었다. 새벽녘에 분노까지 일었다.

 

아기 예수 오신 성탄절에 계엄과 탄핵 때문에 많은 이들이 촛불과 야광봉 들고 나오는 이 시국에도 너도 나쁜 놈이고 나도 나쁜 놈이라며 또다시 우리가 모두 회개하고 기도만 해야 한다는 레퍼토리가 나왔다. 이렇게 기도만 하자는 자들이 전두환 같은 악마의 자양분이 되었다. 심지어 독재자를 세우고 축복기도까지 하는 자들이 이들의 중심에 있었다. 지금도 변하지 않는 양심 없는 자들의 목소리에 구역질이 난다.

 

양심이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 안에는 역사성이 있어야 하고, 정의가 살아 있어야 가능했다. 약자 인지적인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한다. 아프고 나약하고 그 시대에 소수자들과 함께하기 위해서 오늘 오셨던 그 분의 마음을 백만분의 일이라도 알아야 했다. 그 누구나 갖기 어려운 게 양심이었다. 하물며 예수를 따르겠다면서 그 일로 밥 먹고 사는 이들이 그러면 안 된다.

 

“2009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 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에필로그에 한강의 자기 고백적인 글이 나에게는 거의 울부짖는 것으로 들렸다.

 

계엄령에 의한 살육의 시간이 반복되고 있고, 현재에도 또 다른 가면을 쓰고 달려오는 것만 같았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문장에 담긴 사람됨이란 무엇일까?

 

양심이다. 그 양심. 최소한 당신이 사람이라면, 우리가 모두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거기에 신앙이 있고 오늘 오신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는 자라고 입으로라도 주장하는 자라면, 그분이 그러셨던 것처럼 사랑정의를 위해서 목숨 따위 신경 쓰지 않고 기도하고 할 말 하며 행동으로 모든 것을 보이셨던 것을 안다면, 세상에서 사람 취급받지 않는 자들과 웃고 울고 먹고 마시면서 사랑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제발.. 사람들에게 행동하지 말고 당신 말만 듣고 기도만 하라는 그 입 좀 다물라. 당신의 양심에 화인 맞지 않았다면 제발이지 부탁한다.

 

신이 인간으로 와서 우리의 역사에 개입하기 시작한 바로 그 날이 오늘이다.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어린 동호가 엄마 손을 잡고 햇볕이 있는 쪽으로 이끌어 가듯이, 그의 죽음이 그 많은 이들의 죽음이 나를 우리를 빛으로 이끌고 가고 있고 앞으로도 이끌어 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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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전날에도 잠이 안 왔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다시 꺼냈다. 계엄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싶다면 이 책은 꼭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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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하는데 빨간불에 멈췄다. 하늘 보는데 하얀 빛이 보여. 성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