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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영화와 책

문익환 평전

by 달그락달그락 2024. 9. 16.

 

문익환 평전. 2004년 초판 읽고 그때 가슴이 얼마나 울렁였는지 모른다. 14년이 지나고 2018문익환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판이 나왔는지도 몰랐고 몇 달 전에 구입해서 책꽂이에 모셔놨다가 오늘 아침에서야 펼쳤다.

 

20년 전 그때 무엇이 그리 치열했는지 모른다. 활동에 지치고 사람에 치여서 하늘 보며 한탄할 때 많았다. 그 당시 평전(초판) 읽고 마지막 이 한 문장을 만났었다. “사랑을 가져라. 사랑은 지치지 않는다.”

 

문익환 목사님. 북간도에서 태어나서 초··고교 과정을 마치고, 일본신학교에 유학한다. 만주의 창춘에서 목회하다가 1946년에 월남하여 서른 살의 나이로 한국신학대학(현재 한신대)을 졸업하면서 목사 안수를 받는다. 1949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 유학했다가 6.25 전쟁 발발하자 서른세살의 나이로 유엔군에 지원해 통역자로서 정전회담에 참여한다.

 

1955년 미국에서 돌아와 한신대와 연세대 등에서 신학 강의하면서, 한빛교회 목사가 된다. 1968년부터 신·구교 공동 성서번역의 책임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76년 갑자기 3·1 민주구국선언'에 연루된다. 이때 그분의 나이가 쉰아홉. 그때부터 일흔일곱 이 땅 떠나시기 전까지 여섯 번에 걸쳐 12년간의 옥살이를 한다.

 

민주는 민중의 부활이요, 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다!” 1976년부터 강조하던 이 말씀을 1989년 봉수교회에서 전한 다음 히브리 민중사를 쓴다. 그렇지. 그렇고말고. 민주주의가 완전히 이루어지고 평화적인 통일을 맞는 해 우리 민족은 부활한다.

 

역사를 두 번째로 만났을 때는 명동학교 6학년. 소련과 중국이라는 사회주의의 본고장에서 터를 잡았던 명동촌 사람들이 세계사의 조류에 밀려 조선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명동학교를 사회주의 인민들에게 빼앗긴다. 훗날 방북재판의 상고 이유서에서 그는 이것이 생애 최초의 좌절이었다고 토로한다. 이렇게 사회주의와의 불화로 시작된 역사적 체험들은 계속되어서, 평양 숭실 학교에서 신사참배 거부로 자퇴, 도쿄 일본신학교에서 징집 거부로 자퇴, 아버지의 거듭된 구속(첫 번째는 일본 헌병대에게, 두 번째는 공산당원들에게, 그다음에는 소련군에게, 그중 두 차례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처형을 면한 아슬아슬한 것이었다), 그리고 월남과 서울에서의 좌우 대립으로 확장 되어간다.”_문익환 평전 35

 

문 목사님 어린 시절의 힘겨움, 중년의 악전고투 시련기, 인생 후반기는 투쟁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의 저자인 김형수 작가는 문익환의 이름에서 불멸의 저항정신''탁월한 지도력'을 연상하는 것에 나는 동의하지 못한다면서 그에게서 적을 미워하려는 의지가 없었고 그의 행동에는 늘 전략과 전술이 담겨 있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이 글을 읽는데 가슴이 왜 이렇게 쿵쾅거리는지 알 수가 없다. 그분을 싫어했던 독재자들과 극우세력, 심지어 주류 개신교계 안에서도 빨갱이라며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그 누구도 싫어할 의지가 없었고 어떠한 전략도 없이 하늘과 가슴이 원하는 일을 그저 뚜벅뚜벅 행했을 뿐이다.

 

그렇지. 사랑은 절대로 지치지 않는다.

 

너무 닮고 싶은데 그 삶을 보면서 가슴 떨리게 애잔한 마음이 들고, 넘기 어려운 커다란 벽이 있는 거인. 조금이라도 쫓아가 보려고 아등바등했지만, 그저 하늘 저 멀리 있는 존경하는 스승으로서만 가슴 안에 모셔 놓은 분.

 

#늦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