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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새길

철학자 예수, 종교로부터의 예수 구하기; 함께 살아감의 철학

by 달그락달그락 2024. 9. 15.

 

 

중학생인 두 아이가 교회 유튜브 영상과 PPT 담당하며 봉사한다. 청소년 예배 마치면 대예배실 와서 내 옆에 쪼르륵 둘이 앉아서 막내는 예배 상황 유튜브 송출하고 큰 아이는 PPT 넘긴다. 원래 내 할 일이었는데 기계치인 내가 막내에게 도움을 청했다. 학교 방송반이기도 하고 이 분야는 나보다 100배는 잘한다.

 

아이들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황 권사님이 컵에 정성스레 물을 담아서 막내가 있는 영상 송출 기구 있는 예배당 구석에 가져다주셨다. 컵 받침까지 있다. 그러지 마시라고 말씀드렸는데도 넉넉한 웃음 지어 주신다. 연세가 80대 중후반인 우리 권사님.

 

불과 몇 년 전 아프시기 전까지 교회에서 어려운 분들 지원하는 반찬 배달 등 여러 궂은일을 도맡아 하셨다. 무엇이든 나누고 배려하시는 모습이 몸에 배어 계신다. 뒤에 앉아서 조용히 예배드리는 모습, 그 존재만으로 배움이 크고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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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읽은 몇 권의 책 중에 이 책만큼은 지인들에게 꼭 권하고 싶어서 몇 자 적는다. <철학자 예수_종교로부터 예수 구하기> 이번 해 3월에 출간된 강남순 교수님 책이다.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종교가 없어도 예수가 누구이고 그가 원한 세상이 어떤 곳이었는지, 인간이 만들어 낸 기독교라는 틀이 어떤 일을 벌여 왔고 현재 우리 사회에 기독교를 통한 사회적 혐오를 어떻게 만들어 가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 해법도 성서와 역사를 기반해 현재 우리 사회 현실에 맞추어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철학자 예수라는 제목과 같이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우리 사회 모든 이들이 예수의 삶에서 이 땅에 힘겨움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와 관계 없이 읽어 보면 좋겠다.

 

“기독교인이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믿는다'라고 고백할 때는 세 가지를 지속적으로 조명해야 한다. 첫째, 내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예수'는 누구인가’; 둘째, ‘구세주'란 어떤 의미인가; 셋째, 믿는다'라는 것은 이 21세기를 살아가는 내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p. 323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며 교회 건물 안에만 앉혀 놓으면 천국 간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실제 예수가 우리에게 바란 것은 무엇이었고, 이 땅에서 예수가 말하는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고, 나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자기 성찰이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옳다. 최소한 예수처럼 산다고 한 사람들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그렇지 않고 누군가의 말이 예수의 말인 줄 알고 그대로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어떤 삶을 사는지 계속해서 확인하는 중이다. 극단적인 예로 기성 교단이라고 이야기하는 주류에서 이단이라고 하는 자들이 어떤 일을 벌이고 있는지 보면 너무나 쉽게 알 수 있다. 그냥 맹목적이다. 이단이라고 치부한 사람들만 그런 게 아니다. 기성 교단에서 행해지는 일을 보면 황당한 일도 많다.

 

“교황, 추기경, 신부, 목사, 신학자, 철학자 등 그 누구도 '예수는 이런 문제에 이렇게 하라고 한다'라고 단언하여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각자가 치열하게 성찰하고, 고민하고, 각자의 정황에서 ‘어떻게’를 매번 고민하고 조명해야 하는 과제다.” p323

 

종교를 가지고 있다면 그가 믿는 신이 어떤 삶을 바라면서 살아 냈고 이 땅에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 공부하고 성찰하면서 살아야 옳다.

 

“예수의 "나는 길이고, 진리고, 생명입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신에게 다가갈 수 없습니다"라는 이 선언은 '나'라는 주어가 되는 '예수'와 그 예수를 통해 도달하는 '신'은, 결국 그 예수가 실천하고 가르친 '길'인 정의, 환대, 용서, 사랑, 평등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p342

 

이 말씀을 기준으로 어떤 이들은 차별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고, 소수 어떤 이들은 정의와 용서, 사랑, 평등을 실천하는 지침으로 삼는다. 나와 다르다(종교, , 민족, 계급 등)고 혐오하고 차별하는 짓은 예수의 가르침에 반하는 일이다.

 

“굳어진 종교적 교리에 갇힌 예수, 혐오와 차별에 호명되는 예수, 배제와 심판의 예수로부터 경계 없는 사랑, 타자에 대한 연민, 모든 사람을 평등하고 존엄을 가진 인간으로 대하고 구체적인 모든 종류의 정의를 이루기 위해 개입하고 연대하는 그 예수로 구해내야 하는 것이 바로 21세기 '예수 구하기' 운동이며 철학이 되어야 한다.” p349

 

책의 마지막에 예수가 제시하는 길과 진리, 생명이란 결국 모든 생명이 서로 따스한 온기를 주고받으며, 함께 먹고, 마시고, 웃고, 슬퍼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는 함께 살아감의 철학’"이라고 못 박는다.

 

함께 살아감의 철학. 이는 예수의 최후 심판에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반드시 심판이 있다고 했고 도움이 필요한 타자에게 연민과 환대를 실천했는지에 대해 그러한 사람들까지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주셨다.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내 보기에 간단하다. 약자와 삶으로서의 연대다. 그들과 차별도 혐오도 없는 함께 사는 세상이다. 함께 살아감이다.

 

손녀보다도 더 어린 친구들에게 먼저 나서서 물 나누며 넉넉한 웃음을 보이는 삶에서 나타나는 그 작은 실천의 합이다.

 

종교와 성, 민족, 정치 등 수많은 다름을 가진 인간 군상들이 진영에 갇혀 예수를 팔면서 하는 짓을 아픈 역사에서도 보아 왔고 현시대에도 너무나 적나라하게 비추고 있을 때가 많다. 예수님의 세상은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존중하고 존중받는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이다. 말로만이 아닌 삶으로서 이 땅에서 실천해 내는 일이다. 그 삶이 저세상과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 땅은 없고 저세상만 존재한다면서 종교중독에 허덕이며 이 땅의 삶은 그저 한두 명의 종교 지도자의 명령에 복종하는 게 영생을 누리는 길이라고 믿으며 끝간데 모르고 이기적인 자기 욕망에 흔들릴 때가 아니란 말이다.

 

오랜 시간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진 기독교라는 틀을 넘어 예수가 2000년도 전에 30세 청년으로 와서 3년 내외 보였던 그 짧은 시간에 보였던 행보를 보면 답이 나온다. 이 땅에서 이 시대에, 우리나라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 내야 하는지 나를 돌아볼 일이다.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