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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는 이야기

20대 소개팅녀 만났을 때 불안했다. 안정은 나를 알아가며 주도적 삶을 살아 내는 곳에서 만들어진다.

by 달그락달그락 2023. 11. 28.

20. 돈이 없었다. 가끔 알바 했지만 호주머니는 언제나 텅텅 비어 있었다. 당시에도 대화하며 분위기 살리고 장난치는 재주가 있어서인지 선후배들 술자리, 갑작스런 미팅 자리 등 여러 곳에 자주 불려 나갔다.

 

술에 빠져 살던 때여서 그런 자리 좋아했다. 외로움 달래며 세상이 왜 이런지 개똥철학 들어 줄 새로운 동성, 이성 친구들까지 있었으니, 나에겐 더할 나위 없는 좋은 공간이었다.

 

어느 날인가 친구가 소개팅이라면서 나가 보라고 했다. 이쁜(?) 친구라면서 꼭 만나 보라고 했다. 왜 나를 안내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 생각 없이 나갔다. 오후 4시 언저리에 만나자고 했고 카페가 아닌 호프집 비슷한 술집이 장소였다. 약속 장소에 가보니 짧은 미니스커트에 살짝 한 화장이 매력적인 여성이 앉아 있었다.

 

갑작스레 내가 지금 와 있는 곳이 미팅이나 어떤 모임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최소한 술은 못 사더라도 차라도 한잔 사야 하는데 호주머니 든 돈이 몇천 원 없었다. 집에 갈 차비라도 되려나?

 

한참 대화 이어가다가 내가 돈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이 친구 그 소리 듣더니 미소 짓더니 괜찮다고 오늘은 자기가 모두 사겠다면서 술도 밥도 샀다. 그날도 살짝 취했고 즐겁게 대화하고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이후로 만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날 이후 그 친구 전화도 삐삐도 피했다. 그냥 만나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오늘은 쉬는 월요일이다. 대학에서 강의한다. 오후 강의 마치면, 대학원 강의까지 두 시간여 시간이 빈다. 매주 가는 카페에서 노트북 켜고 할 일 하는 게 루틴이다. 오늘은 자주 주문하는 샌드위치와 빵이 안 보인다. 모두 팔린 모양이다. 레몬차만 주문했다.

 

벨이 울려 주문한 차를 찾으러 갔는데 차 내어 주는 분이 선물이라면서 꽤 비싼 샌드위치를 주셨다. 뒤에 사장님인지 지배인인지 모르겠지만 항상 계셨던 남성분이 방긋 웃어 준다. 자주 오셔서 선물이라면서 내어 주었다. 샌드위치가 고마웠고 나를 알아봐 주는 마음에 기분이 좋았다. 이전에도 남은 빵이라면서 싸 주던 분이다.

 

지금에 나는 20대의 나와는 주머니 차이가 완전히 달라졌다. 카드도 몇 장 있고 은행 잔고도 조금 있고 대출받은 것도 넉넉(?)히 있다. 밥 먹고 사는 데 문제는 없어 보인다. 선후배들 밥이나 술도 가끔 살 정도가 되고, 후원하는 곳도 꽤 된다. 돈이 남아돌아서가 아니다. 그냥 이렇게 사는 게 좋다.

 

20대에 삶과 지금의 삶이 많이 달라졌지만, 지금이라고 뭐 특별한 게 있을까?

 

오늘 카페에서 고맙다고 선물해 준 7, 8천원 하는 샌드위치 하나 보면서 갑자기 20대에 소개팅 했던 그녀가 떠 올랐다. 아름다웠고 유쾌한 친구였는데 왜 안 만났을까? 첫 만남에서 얻어먹은 게 괜히 쪽팔려서 그랬나? 모르겠다. 그때 내 속마음이 어떤지는 지금도 모른다.

 

카페에 손님이 거의 없다. 월요일 오후 내 사무실처럼 쓰는 공간

 

 

20대 청년의 때는 모든 게 힘들었다. 내 삶도 고달팠고 정치 사회적으로 불만도 많았던 때다. 미래도 너무 복잡하고 불투명하던 때다. 그때와 비교해 지금은 많이 안정되어 있다. 일이 없어서가 아니다. 일은 그 당시보다 10배 이상은 늘어났고, 만나는 사람들도 그만큼 비례해서 많아졌다. 20대에 비해 현재가 훨씬 더 역동적이고 불안정하지만 안정적이다.

 

실제 살아 내는 삶은 불안정해야 하는데 왜 안정적이 되었을까? 청년기에 비해 현재 내 삶을 거의 주도할 수 있는 힘이 생겨서다. 20대 그녀에게 맥주 얻어 마시고 알딸딸하게 취했는데 이상하게 마지막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른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멋진 친구였는데 내가 나에게 무언가 불만족했다. 그녀와 수평적 관계에서 주도할 수 없어서 그랬을까? 내 옹졸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그 순간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안절부절못했던 내 초라한 모습 때문이었을까?

 

안정이란? 주도적 힘과 닮았다. 내 삶을 안정적으로 한다는 것은 바다를 항해하면서 조용한 바닷물결을 항해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험한 파도가 와도 그 파도를 타고 넘어가는 힘이 있을 때 안정적이 된다. 환경에 휘둘리면서도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자기역량이 있을 때 안정성이 커진다. 그 기반에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서로 의지하고 함께 하는 사람들이 많을 때더욱 더 안정성은 커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잘 알아 가는 것이다. 그 당시에 비해 지금은 내가 나에 대해서 조금은 더 알고 있는 것 같다. 20대의 나는 내가 어떤 존재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르고 있던 때다. 생각만 많고 책에 눌려 살면서 머리만 키우던 때였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머리가 커졌는지도 모른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이 노래 가사가 정답이다. 나를 알아가는 삶의 과정이 안정을 키운다. 여러 힘겨운 일들 풍파가 와도 주도적으로 헤쳐 나갈 힘이 생긴다. 안정적으로 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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