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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및 관점/마을과 관계

마음이 아픈 사람도 더불어 살 수 있는 마을

by 달그락달그락 2023. 11. 13.

우리는 모두 마음이 아프다

 

사람은 누구나 몸이 아프다. 아플 때는 아프다고 이야기하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의사, 간호사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구, 이웃, 직장 동료 등 도움 받아야 할 사람이 많다.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빨리 알아채고 도움을 요청하여 치료받는 일이다.

 

손가락에 작은 가시 하나가 박히면 얼른 뽑아낸다. 혼자 안되면 옆에 가족이나 동료에게라도 뽑아 달라고 한다. 코로나, 독감과 같이 누군가를 전염시킨다고 여기는 병은 더 조심한다. 가까운 이들에게 아프다는 것을 빨리 알리고 조치한다. 뼈가 부러지거나 피가 나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마음이다.

 

이비인후과, 산부인과, 내과, 외과 등 자유롭게 드나들지만 정신의학과는 예외다.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누군가 정신과 입원했었다고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기 일쑤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마음이 아픈 것을 말하지 못하는 문화가 있다. 이전에 비해 정신이 아픈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고 실제 진료받는 이들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정신질환자가 2017년 약 340만 명에서 지난해 2022465만 명으로 5년 새 약 37% 증가했다. 국민건강보험에서 병원에 들른 숫자만 잡힌 통계다. 이 중 우울증 환자가 100만 명이 넘었다. 인구가 5천만이니 10명 중 한 명은 정신과 진료를 받았거나 받는 중이다.

 

문제는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힘겨움을 겪고 있을 사람들이다. 추측건대 정신이 아픈데도 병원에 가지 않고 견디는 사람들이 병원 다니는 사람들의 몇 배는 될 것이다.

 

우리는 자주 정신이 없다고 말한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정신이 없는 육체를 생각해 보았나? 그런데 우리 사회는 실제 정신이 없어야 살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가는 것만 같다.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격차와 치열한 경쟁, 사회적 단절, 외로움 등 사람 살기 힘겨운 환경이 커진다. 자살자 수 통계만 봐도 그렇다.

 

2022년 한국의 자살률(인구 10만 명당)25.2명이다. 2021년 자살사망자 수는 13,352명이다. 1일 평균 자살자 수는 36.6명이다.

 

자살률 높은 직업군을 찾아보니 2021년에서 5년여간 사망한 환경미화원이 280명으로 높게 나타났다. 최근 초등학교 교사의 자살 때문에 교권에 대한 이슈가 있었다. 21년 기준으로 6년간 재직 중 자살로 사망한 유···고교 교사가 76명이었다. 매년 환경미화원은 56명이, ···고 교사들은 13명 내외가 자살로 삶을 마감하고 있었다.

 

아동 청소년 삶의 질 2022’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0~17세 청소년의 사망 원인 1위는 자살이다.

 

무슨 말이냐고?

 

우리가 자살할 정도로 정신적인 어려움을 크게 겪고 있다는 말이다. 인구 10만 명당 OECD 평균 자살률 11명의 2배를 넘는 수치다. 우리나라가 2003년 이후 OECD 자살률 부문에서 1위 자리를 내준 것은 단 2개 연도(2016, 2017)뿐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플까?, 내 마음의 아픔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는 아닐까?

 

 

내가 넘어졌을 때 손잡아 줄 사람들이 필요하다

 

설렘, 우울, 분노, 만족, 공포, 걱정, 불안, 강박, 압박 등 우리가 모두 느끼는 마음의 아픔이 있다. 몸과 같이 아픔도 견딜 수 있을 정도의 건강이 있으면 좋으련만, 마음은 몸처럼 바로 알기도 어렵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한번 아프면 큰 병이 되기도 한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넷플릭스 드라마 사진

 

 

정신병원에도 아침이 와요라는 드라마를 봤다. 모두 보는 데 이주 걸렸다.

 

우리는 모두 경계에 서 있다. 불안과 안정의 경계, 우울과 비우울의 경계, 우린 모두 낮과 밤을 오가며 산다. 우리는 모두 정상과 비정상에 있는 경계인이다.” 다은의 마지막 말이 좋았다.

 

다은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경계에 서 있다. 청소년이나 다문화, 이민자만이 아니다. 정상이라고 하는 중간 분포에 대부분이 걸쳐 있지만 누구나 한순간에 경계를 넘나든다. 경계를 넘어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 이도 있고, 바로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경계를 넘어가 있는데도 다른 쪽에서 아프게 살아 내면서 경계가 어딘지 모르고 살기도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우울이 찾아와서 아플 수도 있다.

 

이 사회에서 내가 나로 존재하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경계를 인지하는 것, 넘어졌을 때(경계를 넘어갔을 때)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내가 아프다는 것을 인지하는 힘. 메타인지, 자기 객관화는 내가 어느 정도 힘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마지막까지도 나의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사람과의 관계를 만들어 내는 일 또한 내가 힘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그 힘은 나에게서 나온다. 가장 먼저 나(의 마음)를 돌볼 일이다.

 

안전기지라는 이론. 영국의 정신과 의사인 존 볼비가 제시했다. 믿고 의지할 수 있으며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대상이 안전기지. 강하고 지속적인 유대감이 있을 때 형성된다. 나에게 우리에게 안전기지가 있어야 산다. 가족, 연인, 부모, 이웃, 직장 동료, 친구 등 누구나 될 수 있다.

 

안전기지만 있어도 문제다. 적당한 좌절이 봉쇄되기 때문이다. 헬스클럽에 가서 운동하는 것은 근육에 조금씩 흠집을 내는 행위에 가깝다. 무거운 것을 들고 당기고, 앉았다가 일어나는 행위를 반복하는 운동은 근육을 괴롭게 해서 조금씩 찢어 내기 위한 일이다. 찢어져 상처 난 근육은 바로 다시 새로운 근육이 붙고 더 커지고 단단해진다. 이전보다 더 무거운 것을 들 힘이 생기는 이유다.

 

마음도 비슷해 보인다. 좌절이 없으면 마음의 근육은 생기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적당한 좌절이다. 이길 수 없는 좌절, 절망에 빠지면 우리는 마음속 어디로 숨어 버리거나 깊은 우울을 겪기 마련이다. 적당한 좌절을 경험하면서 이겨 온 사람은 숨기보다는 직면해서 우울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커진다.

 

청소년, 청년을 만나 오면서 내 안의 나를 보게 되었다. 마음이 아프다는 것도 모른 채 살다가 힘든 경험도 했었다. 적당한 좌절, 안전기지,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나누는 공동체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이유다.

 

 

안전기지는 마을공동체로 확장해야 옳다

 

2016년에 일본 베델의집에 방문했었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있는 마을이다.

 

당시 조현병을 앓고 있는 분을 만났다. 자기 몸속에 12명의 사람이 함께 살아간다고 했다. 사회복지사 중에서도 병을 앓고 있는 분이 계셨다. 이상한 행동을 보여서 당황하기도 했다. 이분들의 삶을 유심히 보면서 알게 되었다. 경계에 오며 가면서 살아가기에 조금은 다른 모습이지만 모두가 마을에서 함께 사는 힘이 있었다. 그 힘은 그들 경계 너머의 삶을 존중하는 데에서 나왔다.

 

베델의집 초기 모습, 당시 낡은 교회건물

 

 

베델의집1978년 일본 홋카이도 우라카와 시 적십자병원에 사회복지사로 근무하던 무카이야치 씨가 낡은 교회 건물에 둥지를 틀면서 시작되었다. 우라카와 적십자병원의 정신과를 거친 이들 가운데 주로 조현병인 사람들이 하나둘 낡은 교회로 모이면서 시작한 공동체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강점과 그들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 스스로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환경을 만들어 냈다고 평가받는다.

 

아침에 정신장애를 겪고 있는 분들과 사회복지사들 전체가 모여서 회의하는 모습을 참관했다. ‘당사자 연구(당사자 자신이 생활과 현실에서 겪고 있는 생활의 고충에 대해서 함께 연구하는 것)’라면서 조현병 겪고 있는 어떤 분이 자기 최근 삶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었고 이 내용을 칠판에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당사자 연구의 시작이다. 서로가 응원하고 지지하는 모습이 색달랐다.

 

베델의집에 대부분 사안은 참여자들의 회의를 통해 결정하며 자활, 직업훈련까지 고려하여 이분들이 마을에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특히 정신병을 앓고 있는 분들이 마을의 주민들과 어울려 생활하면서 당사자들이 주체가 되어 사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었다.

 

 

카와무라 선생님, 저녁 시간에 우리 일행 환영식에 참여해서 말씀 나누어 주셨다.

 

 

"정신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정상적 변화를 위해 정신과 의사인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라고 말하는 베델의집 초기부터 함께 했던 카와무라 선생(정신의학과 의사)의 말씀에 생각이 많았다.

 

베델에서 정신 장애인이 자기 이야기를 두서없이 마구 쏟아 냈다. 우리 일행을 안내하는 사회복지사는 이분은 원래 소리를 크게 내며 자주 이런다고 했다. 치과 치료 받다가 경찰이 와서 데려간 이야기 등 앞뒤 문맥이 맞지 않는 이야기를 모두 통역해 주셨는데 자세히 듣다 보니 메시지가 있었다. “이 세상이 편했으면 좋겠다. 평화롭고 누구나 사랑했으면 좋겠다라는 말이었다. 이분의 이야기를 아침 조회에 참여한 분들 모두가 훌륭한 강연자가 강의 하는 것을 듣듯이 경청했다. 최대한 존중하고 있었다. 이곳의 문화였다.

 

이들의 안전기지는 병원이나 가족이 아니었다. 그들과 같은 삶을 살아 내는 마을 주민과 동료 정신 장애인들이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들의 삶에서 조금 엿볼 수 있었다. 환각, 환청까지도 경청하는 이들의 삶의 태도가 결국 이러한 공동체를 만들어 냈다. 안전기지가 소수 가까운 이들을 넘어 마을 전체가 되어 있는 것이다.

 

 

마음이 아파도 가두지 않고 살아 낼 수 있는 공동체다.

 

우리는 어떤가? 개인과 개인의 안전기지는 만들어져 있는가? 경계 안에 들어와 있는 청소년들의 이야기, 청년들의 이야기, 우울에 빠지거나 분노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있는가?

 

마음이 아플 때 내가 아프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 마음이 아플 때 안전지대로서 아프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아야 한다. 가족뿐만 아니라 내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가 그런 공간이어야 한다. 마음이 아파도 서로를 신뢰하며 함께 살 수 있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길만이 우리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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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이 중심이 되어 모든 세대가 함께 하는 공동체, 내 표현으로 안전한 관계의 공간이다

 

 

안전기지는 내 관점으로 안전한 관계의 공간이다. 누구나 안전해서 평안함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은 그곳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관계에 있다. 서로 간 신뢰와 유대감이 커지고 다양함을 존중하는 삶의 공간이다. 적당한 좌절을 만났을 때 당사자가 이길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공간이다.

 

내가 꿈꾸는 누구나가 사람이라면 사람으로 존중하고 존중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