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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및 관점/비영리 조직운영

상대가 싫어하는 소리를 하는 이유

by 달그락달그락 2022. 8. 27.

상대가 고쳤으면 하는 행동이나 말을 하는 것을 꺼리는 이들이 많다. 당연하다. 상대의 문제 있는 이야기를 했을 때 좋게 받아들이는 이들보다 대부분 불쾌해한다. 듣기 싫은 말을 하게 되면 반드시 저항이 생긴다. 그 저항이 싫어서 상대에게 좋지 않은 모습이 보여도 내버려 두는 이들이 많다.

 

고쳤으면 하는 싫어하는 소리뿐만 아니다. 직장 일 이외에 개인적인 질문을 조금이라도 하는 순간 선을 넘는다고 경계하며 저항하는 이들도 있다. 특히 요즘 2, 30대에서 경계 짓는 일이 심하다고 비판하는 기사와 글을 많이 보게 된다.

 

그제 과 저녁밥을 먹었다. 이 친구 직업은 의사다. 가끔 진단 후 몸은 괜찮은데 마음이 아픈 환자를 만나는 모양이다. 의사 대부분은 신경을 쓰지 않고 자신의 전문분야에 관해서만 설명하고 마치지만, 이 친구는 대화 중에 문제를 알게 되면 직설적으로 그렇게 하지 말라고 지적을 한다. 환자를 마음을 다해 돕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한 직접적인 조언(?) 때문에 환자가 괜히 오해해서 병원에 발을 끊기도 하지만 문제를 알게 되면 정확하게 말을 하는 의사다. 저항을 이길 힘이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사무실 벽에 붙어 있는 펭수와 친구들. 둠칫하는 이 친구들 관계를 생각해 보면 재밌어.

 

30대 후반까지 내가 싫어하는 한두 명을 제외하고 내 주변에 모든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줄 알고 살았다. 이 글 읽다가 웃는 사람 있을지 모르지만 진심이다. 나는 나와 관계하는 모든 이들이 나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고 살았다. 그런데 언젠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도 내가 가장 아끼던 한 후배를 통해서다. 기관에서 일할 때 동료를 대하면서 잘못한 것이 있으면 바꾸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성격이다.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다. 고위직 공무원이나 정치인을 만나도 비슷했다. 토론회장이나 포럼, 회의에서도 거칠 것이 없었다. 그것이 나와 타자를 속이지 않고 관계하며 상대를 존중 하는 거라고 믿었다.

 

후배는 내가 자기를 가르치려는 모습과 그를 대하는 태도 때문에 상처를 받았고 나에게 반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충격을 받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충격을 받은 이유? 나는 저 친구를 정말 사랑해서 잘되라고 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아끼는 후배가 자신이 좋아하는 친구라고 소개했고 이후 교육도 하고 여러 곳에 데리고 다니면서 기관에까지 취업시켰다고 여겼는데 뒤에서 하는 비방과 뒷말을 알게 되면서 심각하게 나를 돌아본 일이 있었다.

 

한 참 고민한 후 그때 알았다. 나는 선의고 사랑이며 그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전하는 과정에서의 내 태도와 말투 등이 문제였다. 가끔은 화도 냈다. 내 입장에서는 당연히 후배 잘되라고 화도 내고 내 시간 쪼개서 설명도 해 준다며 자위했지만, 그 친구는 그러한 과정이 힘들었고 상처였던 모양이다.

 

이후 다른 일도 있고 내가 원하는 활동이 있어서 기관을 사직하고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그렇다면 내 태도가 완전히 잘 못 되었을까? 그런 것만은 아니다. 똑같이 대화했고 관계했던 후배 중 지금도 만나기도 하고 어떤 친구는 대학원 이후 첫 직장에 취업해서 지금까지도 함께 하는 후배도 있다. 더군다나 그 후배를 안내한 선배는 매년 명절 때 빠지지 않고 찾아와서 인사한다. 모든 선후배에게 대하는 태도는 유사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진정성 가지고 사랑을 하더라도 타자가 그 사랑을 받지 못하거나 오히려 폭력으로 인식할 경우에는 멈추어야 한다. 무엇을 전달하는 자가 방법을 바꾸든지 그만하거나 관계를 재정립해 보는 게 좋다. 상처받은 후배에게 내가 그래야 했다. 내 잘못이 크다. 똑같이 대해도 어떤 이들은 그냥 넘길 말도 어떤 이는 상처로 남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런 존재다. 모든 게 나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도 그렇다. 상대가 상처를 받는 것을 보지 못하고 온전히 내 중심의 사랑을 퍼부어 댄 거다. 자칫 폭력이 된다는 것을 몰랐고, 나는 잘 하고 있으니 누구에게 사랑받을 거라고 믿었던 거다. 완전 웃기는 놈이었다.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계속해서 조심스러워지는 것만 같다. 무엇을 준다는 것이 힘든 일임을 알게 된다. 상대를 위해서 한다는 것, 상대에 의해서, 상대와 함께 하는 수많은 관계와 일에서 공감 능력이 그래서 더욱더 중요해졌다.

 

시간이 가면서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럼에도 가능하면 할 말 하면서 살려고 하지만 이전처럼은 안되는 것 같다. 그것도 ’, 에너지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에너지에 의해 가슴도 열리고 솔직해지면서 직면이 빨라진다. 화를 낼 수 있는 에너지, 분노할 수 있는 에너지, 상대가 잘 못 하거나 문제가 있을 때 바꾸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문제를 직면시킬 수 있는 에너지다.

 

대학에서 학생들이 집중해서 강의 참여하기도 하지만 잠을 자거나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거나 심지어 옆 친구와 대화까지 하는 이들이 있을 때, 내버려 두는 선생이 있고, 나처럼 화를 내거나 강의를 듣지 말고 다른 것 수강 신청하라는 사람도 있다. 남아서 따로 이야기까지 하고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보려고도 한다. 학생이 싫어서 내 보려고 하는 게 아니다. 귀한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 행위로 보이기 때문에 다른 더 좋은 것을 찾으라는 권고다. 이러한 태도를 언제까지 고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전자의 선생들처럼 내버려 둘 때가 오면 강사질 하는 대학도 모두 그만둘 생각이다.

 

인간의 문제란 모두가 각자의 서사가 있기 마련이다. 나도 상대도 서로가 고쳐야 할 부족한 점이 있을 때 서슴없이 이야기해 주고 고려가 가능한 관계, 그 이야기들이 모두가 우리 모두를 위해서 전달 된다고 여겨지는 공감의 관계, 인간관계에 선은 있으나 그 선이 가급적 지워져서 서로가 신뢰하며 아끼며 사랑하는 관계. 이 모든 일이 결국은 어떤 저항에 부딪혀도 이길 수 있는 서로 간에 힘이 필요하다는 것, 이것 만은 확실해 보인다. 배운 사람은 그 저항을 적절히 뚫고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기술이 있는 사람일 뿐 본질은 그 안에 닿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