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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는 이야기

아버지의 외상 술

by 달그락달그락 2022. 8. 20.

아빠 나랑 옷이 똑같네. 런닝하고 반바지. 헤헤~^^” 막내가 웃으며 한마디 했다.

 

한 분은 출근하고, 한 친구는 학교 가고, 초등학생인 막내와 나만 덩그러니 집에 남았다. 집콕하려고 작정하고 책상에 앉았다. 어제 휴가 마지막 날. 10시 넘어서 일어난 아이 밥 먹는 거 보고, 책 읽다가 시간이 어찌 갔는지 모른다. 저녁때쯤 연구소에 실습생 평가회만 잠시 다녀오려고 알람 맞춰놨다.

 

시계 보니 점심 먹을 시간이 훨씬 지났다. 막내가 배고프다고 해서 햄버거하고 샐러드를 배달해서 먹었다. 아이가 맛있게 먹는 모습 보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아이 물끄러미 보는데 갑자기 아빠 얼굴이 떠오른다.

 

내가 지금 막내 나이인 초등 6학년 방학 때였나? 아버지 사업이 아주 폭삭 망한 이후 시를 쓰시겠다며 집에 계실 때였다. 술을 계속 드셨고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었다. 어머니는 회사에 다니기 시작했다.

 

지금의 막내 나이 때에 매일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었던 나에게 아빠는 술만 드시면 나가지 못 하게 하고 책을 보라고 강압했다. 술 드실 때가 많으니 억지로 책을 봐야 할 시간도 많아졌다. 너무 싫었다. 그 나이에 읽을 수준의 책도 아니었다. 지금 우리 아이들이 도서관에서 빌려 보는 청소년용 책이 아니었고 대부분 글이 세로로 되어 있는 오래된 책이었다. 아직도 그때 읽었던 책 제목이 기억이 나. 방랑시인 김삿갓이라니... ㅠㅜ

 

오늘 같은 여름방학이었나? 어느 날 오후 아버지는 그날도 나가지 말고 책 보라고 했다. 마을 공터에는 이미 친구들이 모여 있었고 친구들이 집밖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도 가끔 들렸다. 아버지는 오후가 되자 이미 취해 계셨는데 나에게 동네 구멍가게에 가서 술을 외상으로 사 오라고 했다. 창피해서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동네 가게에 가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술을 외상으로 달라고 했다. 그럴 때면 아주머니는 꼭 한마디 했다. 뭐라고 했는지 기억도 없지만, 기분은 좋지 않았다. 그래도 아주머니가 외상술을 주면 기분이 좋았다. 무언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한 느낌이었다. 술을 아빠에게 가져다드리면 막걸리 따라 드시면서 노래를 하시거나 갑자기 슬퍼하다가 시를 읊다가 세상을 한탄하는 게 아버지 일이었다. 언젠가 자신의 세상이 온다는 레퍼토리는 똑같았다. 그럴 때면 누구에게 자꾸 욕도 하셨는데 입에 올리기가 싫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아버지가 이 땅을 떠나셨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러 내가 아버지 나이보다도 더 많아졌고 초등학교 6학년 된 막내와 종일 있으면서도 먹고 마실 수 있을 만큼은 외상 안 해도 될 만큼의 경제력은 되었다. 아이 햄버거 먹는 모습 보는데 자꾸만 아빠가 떠올랐다. 지금 살아계셨으면 80살이 조금 넘으셨을 텐데. 어릴 때 술주정하시면서도 항상 눈이 촉촉이 젖어 있던 아빠가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어릴 때 집은 나에게 너무 힘겨운 공간이었다. 대부분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어울렸고, 집은 쉼보다는 그저 잠을 자러 들어가는 곳 정도로 인식했다. 어느 순간 내가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직업이 청소년활동이다 보니 가족, 집에 대해서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이 어떠한지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고 오랜 시간 청소년을 만나 오면서 그들이 삶이 왜 힘들어지는지 가정이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몸으로도 알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 아이들은 집이라는 공간을 나 어릴 때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부모와 집에 있는 게 가장 편하다고 하는 아이들. 가끔 친구들과 놀러 나가지만 학원도 가지 않고 거실에서 모여서 공부하고,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 어릴 때와는 다르게 집이 아이들의 가장 안전한 공간이 되어 감사한 마음이 있으면서도, 내 아빠가 꾸렸던 그때의 조금은 폭력적이고 경제력으로 무능한 가정에서의 기억은 또 다른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러한 공간(?)에서도 내가 많이 아플 때 놀라서 신발도 신지 못하고 나를 등에 업고 정신없이 병원으로 뛰었던 아빠의 넓은 등의 품이 편안했다. 가끔은 막일하시고 일당 받아 오시면 나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막걸릿집에서 한잔하시면서 기분 좋아서 문구점 가서 문구와 장난감 사주시고 오며 갔던 아빠, 늦은 시간 귀가하면 잠들어 있는 나와 동생들 베개 뒤에 군것질거리를 가져다 놓고서는 취해서 노래 부르다가 주무신 아빠, 욕은 하셨지만, 고등학교 때까지도 손찌검을 한 번도 안 하셨던 아버지. 그분과 내 어머니가 계셨기에 그나마 나 같은 사람도 세상에서 사람살이 하며 살고 있다.

 

요즘 갱년기인가 봄. 갑자기 아빠 생각이 나고. 이런. 갑자기 막걸리가 마시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