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새길

복이 뭘까?

by 달그락달그락 2020. 10. 6.

추석 가족 예배 말씀 준비하면서 아이들에게 혹시 나누고 싶은 성경구절 있느냐고 했더니 막내가 팔복을 이야기한다. 아이는 생각 나는 대로 던진 이야기였다. 추석 되면 매번 ‘복’ 받으라고 해서인지 '복'에 대한 생각도 나눌 수 있겠다고 여기고 준비했다.

 

마태복음 5장을 열었는데 읽고 묵상하기 힘겨워 진다. ‘복’을 빌기가 너무 버거워서다.

 

"마음이 가난하며 깨끗하고, 슬퍼하고, 온유하며, 자비하고, 평화를 이루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아야 복된 사람”이라니. 수십 번 반복해서 읽었던 구절인데 다시 새롭게 온다.

 

매일 늦은 밤 반복적으로 기도하는 내용이 가족과 기관의 선후배 등 사랑하는 이들 위해서 복에 대한 기도를 하는데 예수께서 전하신 복은 내가 비는 기도의 복과는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있다. 평화를 이루고 복된 삶에 대한 내 관점은 그렇게도 비판했던 기복신앙과도 한편에서 닮아 있기 때문이다.

 

한쪽에서 세상의 평화를 간구하지만 가족과 사랑하는 이웃과 선후배들 생각하면 그 복이 달라진다. 그들이 이 땅에서도 아프고 상처 받지 않고 잘 되기를 원하는데, 그리스도의 팔복은 그 잘 됨이 세상의 잘 먹고 잘 사는 복과는 다르게 오기 때문이다. 자신의 희생과 헌신을 기초로 하고 방향도 목표도 달리 한다. 그럼에도 그 안에서 아주 큰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

 

그래서인지 계속해서 내 삶이 오락가락 하는 모양이다.

 

추석 전에 SNS에 복된 한가위 되라는 답글을 많이도 달았는데 내가 말한 복은 세상에서의 (기) 복인지, 성서에서 말하는 이 땅에서의 너무 아프지만 가슴으로 평안을 느끼는 복된 삶인지 왔다 갔다 한다. 어렵다.

 

 

처갓집 마당에 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어제 오후에 잠시 명절 인사 드리러 갔다가 그중 3~40센티미터 되는 작은 대추나무를 보았다. 큰 나무들 중에 신기하게도 그 작은 나무에 대추열매가 딱 한 개가 열려 있다.

 

이 작은 나무에 이 큰 대추라니. 그것도 딱 한 개만. 유심히 보다가 그럼에도 이 대추나무는 열매를 열어 복 받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큰 나무도 가끔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떠나더라.

 

나는 계속해서 복된 삶에서 오락가락 할 것만 같다. 아이들 얼굴을 보면서 이 친구들에게 팔복의 복을 만들어 내라고 안내하기도 버겁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서 한두 가지라도 붙잡으라고 이야기하고 있고 부족하나마 그리 노력도 할 거다. 그 안에서 작은 열매라도 한두 가지라도 맺고 싶다. 사랑, 기쁨, 온유와 절제.. 등. 그 크기가 어떨지 모르지만 작게나마 한 두 가지라도.

 

성서에 나오거나 위인으로 기록되는 팔복의 삶을 살아낸 분들의 삶은 존경스럽다. 그렇게 되고도 싶었다지만 불가능했고 내 사랑하는 이들에게 그리 살라고 강요하기도 어렵다.

 

대추나무도 수십, 수백 년을 살면서 엄청난 열매를 맺는 나무가 있다. 이와는 다르지만 이렇게 작게나마 살아서 땅을 비집고 나와서 열매를 하나 맺고 죽는 대추나무도 있다.

 

이 작은 나무를 보니 괜히 짠하고 마음이 간다. 너무나 부족하고 쪽팔리지만 내 모습 같아서다. 나무를 닮았지만 꽃보다도 못한 작은 나무. 열매를 맺는다고 하지만 엄청난 거목에서의 열매가 아닌 어쩌다가 하나 맺는 대추알 하나?

 

기도 중에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겠다고 하지만 십자가에 내 손과 발에 못을 박지 못하는 이유다. 가끔은 괴롭지만 그래도 이게 나인 걸 어쩌나? 그럼에도... 그럼에도 말이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세상의 힘겨움을 넘어서서 참된 평화를 가슴에 품고 싶다. 아주 가끔은...

'일상 > 새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순종과 분별력  (0) 2020.12.20
다단계 업자와 기독교인  (0) 2020.10.18
창조의 의미  (0) 2020.09.30
정치인과 목사들의 의도  (0) 2020.03.24
코로나19를 대하는 사이비와 교회의 차이  (0) 2020.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