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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새길

고양이와 본질의 관점들

by 달그락달그락 2020. 2. 18.

오래전에 어느 수도원이 있었다. 수도원에는 한가지 골치거리가 있었는데 다름 아닌 쥐였다. 건물이 오래되서인지 쥐들이 많았고 예배와 기도시간에 쥐소리 때문에 방해를 받았다. 쥐를 퇴치하기 위해 여러 방법이 동원되었으나 역부족이었다. 누군가가 예배 시간마다 고양이를 한 마리 기둥에 매놓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드디어 쥐들이 조용해 졌고, 고양이 덕에 엄숙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그냥 고양이. 귀엽다^^

 

세월이 흘렀다. 수도원장이 죽고 수도사들이 많이 바뀌었다. 새로운 수도원장도 부임했다. 더 이상 쥐가 활개 치지 않는데도 수도사들은 예배를 드릴 때면 반드시 고양이를 먼저 챙겨서 기둥에 묶어 두었다. 이전 수도원장이 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러웠다.

 

더 많은 세월이 흘렀다. 예배와 기도 전에 고양이를 반드시 챙겨야 했다. 어느 순간 부터 고양이는 예배에 의식과도 같이 되었다.

 

시간이 더 흘렀고 고양이와 예배에 대한 식순이 생겼다. 고양이 관련 연구논문도 발표 되었으며, 고양이를 묶어두는 방식과 끈의 형태, 예배당 안에서 고양이의 위치 등이 심도 깊게 논의되었다. 이 논의 과정에서 의견이 갈리고, 분파가 생겼다. 당연히 반목은 심해졌다. 고양이를 묶는 시간과 끈의 길이 등으로 싸움이 나면서 분파되어 여러 교단이 만들어졌다.

 

오후 성경 공부 시간에 나온 예화 중 하나다. 찾아 보니 출처는 불분명한데 유명한 예화로 보인다. 기독교 신문, 교회, 수도원 홈페이지 등 카톨릭, 개신교 등 가리지 않고 여러 곳에서 비슷한 예화가 넘친다. 많은 분들이 이 예화를 들어서 본질에 집중하라면서 권면하는 그 내용을 보았는데, 이 또한 모두가 천차만별이다.

 

어떤 분은 “고양이에게 관심 두지 말고 사람을 사랑하는 목회를 해야한다.” 고 했고, 어떤 이는 예식의 의미를 잃어버린 목회자와 성도들의 잘못된 습관을 꼬집고 있다. 온전히 깨어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도 있다.

 

예배의 외적인 부분에만 치중하는 모습을 꼬집는 이야기라면서, 안식일임에도 밀 이삭을 먹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는 바리새인을 비유하며 율법 자체보다도 그 율법이 사람을 위한 것임을 안내하는 신부님도 계셨다. 어떤 목사님은 아무리 장엄한 예배(의식)를 드렸어도 훌륭한 설교를 들어도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지 않으면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다라는 주장도 있었다. 신의 임재함이라.. 이 부분 오랜 시간 들어 온 이야기인데 아직도 막막한 것은 내 믿음이 부족해서인지도 모르겠다.

 

형식은 중요하나 이것이 왜 생겼고 왜 이루어지는에 대한 역사적 근거와 본질을 모르면 아무것도 아닌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하게 되는 것 만큼은 명확해 보인다. 성서에 수 많은 예화들이 있는데 그 예화의 결론에 가면 또 다른 측면에서 모두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이들은 오히려 그 예화의 본질과는 다른 자신의 이야기를 붙여 가면서 만들어 내는 사람도 있다.

 

내가 믿는 종교를 갖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 이웃과 신에 대한 사랑이 나에게는 본질이다. 더불어 오랜 역사와 문화, 정치, 사회적 배경 안에서 만들어 온 그 관점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함께 기도와 말씀 가운데 더욱 더 겸손하게 낮아져서 성찰하고 기도하고 삶을 살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앞뒤 맥락 없이 무조건 천당지옥 운운하며 '영'적 어쩌고 하면서 성찰 없이 수준 낮은 자기 주장 강요하는 이들을 경계할 일이다. 예화에 대한 결론 또한 묵상과 자기 고민과 공부와 기도는 반드시 개인이 함께 해야 한다는 것. 

 

내가 가진 신앙을 삶으로 잘 살아낸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 듯. 그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했을 때가 편했는뎅...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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