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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새길

우리에게 진짜 좋은 것은 무엇인가?

by 달그락달그락 2017. 7. 17.

#10대에게 들려 주는 성경 이야기 


지난번 ‘이슬람’이 탄생했던 배경과 아브라함과 사라가 100살이 다 되어 낳은 아기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기억나니? 그 아기 이름이 이삭이다. 아버지 100살, 어머니 90에 낳은 자식이니 얼마나 좋았을까? 이름도 ‘웃는다’는 의미인 이삭이었지. 이삭은 가나안 땅에서 평생을 살았다고 해.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야곱과 비교했을 때에도 굉장히 평온한 삶을 살았지.  


이삭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그의 종 엘리에셀을 메소포타미아로 보내 신붓감을 찾아서 데려오게 해. 엘리에셀이 목마르다 하니 지나던 여성이 자기 몰통의 물은 내어 주고 그 어른(엘리에셀)이 몰고 온 말들까지 물을 먹이면서 돌본다. 바로 리브가라는 처녀였어.  


우여곡절 끝에 이삭이 마흔 살 되던 해에 리브가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삭이 60이 될 때까지 아이를 갖지 못해. 이삭은 사랑하는 아내인 리브가를 위해 기도했고 60살이 되던 해에 쌍둥이 아이를 낳는단다. 에서와 야곱이 탄생하는 순간. 요즘에 쌍둥이 갖는 게 유행이라는데 한 번에 쑤욱 두 명의 자녀를 안게 되는 거지.  


이 쌍둥이 아들 중 막내인 야곱이 이번 주인공이다. 에서와 야곱은 뱃속에서부터 싸웠단다. 리브가는 뱃속에서 발길질이나 태동이 느껴졌다는 표현을 하지 않아. “이렇게 괴로워서야, 내가 어떻게 견디겠는가?1”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할 정도로 힘들었나봐. 기도 중 하나님께서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2”라고 말씀 하신다. 장자의 권한이 동생에게 임했다는 것을 암시하지. 리브가는 이 말씀 때문인지 나중 이삭이 내리는 장자의 축복을 야곱이 받도록 도와 주는 건 아닌지. 


드디어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는데 야곱은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어3. 그래서 이름도 ‘발꿈치를 잡다’라는 야곱이 되었다고 해.  


두 아이가 자라면서 ‘에서’는 남자다움을 과시하며 사냥꾼이 되어서 들에서 살았지만, 야곱은 성격이 조용해서인지 주로 집에서 생활했어.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에서를 어머니인 리브가는 야곱을 더 사랑했어. 



어느 날 에서가 사냥 하고 배가 너무 고파서 집에 왔는데 야곱이 죽을 끓이고 있었다. 당연히 동생에게 죽 좀 달라고 했겠지. 그런데 그 상황에서 야곱은 흥정을 하기 시작해. 죽을 줄 테니 에서 형의 장자권리를 팔라는 거야. 뭐? 이런 동생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니? 만약 내가 밖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귀가했는데 우리 동생이 밥하고 있어서 함께 먹자고 했더니 밥 줄 테니 형 또는 오빠의 권리를 주면 밥 줄게? 뭐.. 이런 다면 너는 어떻게 할래?  


어찌 됐건 에서는 배고 많이 고팠고 장자로서 권리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지금 나에게 맏아들의 권리가 뭐 그리 대단한 거냐?4”라 한마디 툭 뱉고 죽을 받아먹는다. 맏아들의 권리를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다는 것. 오늘 이야기 나누고 싶은 내용은 이 부분이야. 장자로서의 권한은 당시에 굉장히 중요했어.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아들, 장자라고 표현하고, 모세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며 장자라고 하지. 


성경은 장자를 특별히 대우를 하는 것 같다. 아버지의 유산을 다른 형제들보다 두 배 이상을 주기도 하는 등 특별한 권한이 부여 되어 있어. 다만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성서에서 나오는 이스라엘의 장자는 무조건 먼저 난 순서가 아니란 거지. 이스라엘의 장자권은 하나님이 정하는 거야. 이 날 장자권을 죽 한 그릇으로 산 야곱은 아버지가 장자권에 대한 축복을 준다는 에서를 대신해서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자신이 축복을 받아 누린다. 야곱은 에서와 다르게 장자권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완전 개인적인 생각인데, 세상의 눈으로 봤을 때는 야곱은 비열하기도 하고 사기꾼 기질이 있는 것 같다. 형의 권한을 갖기 위해 죽으로 팔라고 흥정하지를 않나 어머니가 시키기는 하지만 장자로서의 축복을 받기 위해 양털 둘러쓰고 아버지를 속이는 장면까지. 요즘 보면 뭐 이런 놈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고는 해. 


어찌됐건 하나님은 야곱에게 축복을 한다. 나는 이 부분을 두 가지 관점으로 이해하고 있어. 한 가지는 야곱이 하나님께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고 그것을 집중해서 얻으려고 노력했다는 거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속이고 흥정하는 일 때문에 아버지 이삭과는 다르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된다. 12남 1녀를 두었고 마지막 숨을 거둔 곳은 기근 때문에 가나안 땅을 떠나 11번째 아들인 요셉이 재상으로 있는 이집트로 이주해서 그 곳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기말고사 시험 기간이 끝났다. 교회에 안 보이던 청소년들도 한둘 보이고는 해. 시험기간 다가오면 2, 3주 전에는 아예 교회에 나오지 않는 친구들이 꽤 많아 보여. 교회에 나와 예배 드리기 보다 시험이 더 중요한 거라고 생각하지. 언젠가는 선생님과 몇 명 청소년들 예배드리려고 준비 하는데 예배는 참여하지 않지만 옆에서 조용히 시험 공부한다는 청소년까지 있더라. 그 친구에게 표현은 안했지만 솔직히 기분은 좋지 않았어.  


그렇다고 이런 청소년을 탓하고 싶지는 않아. 무엇이 중요한지 알아가는 과정은 쉬운 일이 아니거든. 신앙이 일상의 기준이라고 주장하지만 나 또한 신앙생활은 일상을 돕기 위한 한 부분으로 여긴 적이 많았음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요즘 들어 계속 드는 생각은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가?” 하는 거야. 나이를 먹다 보니 사람관계에서는 더 중요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들과 어떻게 관계해야 할지 알아가는 과정인 것 같고, 공부는 더 중요한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일 같더라.  


무슨 말이냐고?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 누구인지, 나에게 본질적으로 가장 이로운 것과 중요하고 좋은 게 무엇인지 우리는 잘 모른다는 거야. 그것을 알아가기 위해 신앙생활도 하고 성경도 읽고 공부도 하고 경험도 하는 게 아닐까?  


문제는 우리에게 교회를 다니는 일은 무엇이냐는 거야? 부모님 다니니 따라다니는 건가? 그저 일상에 습관적인 액세서리 정도인가? 


어떻게 생각하니? 


신앙생활이 우선일까? 학교에서 시험점수 조금 더 잘 맞게 하는 게 우선일까? 찾아보니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더라5.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을 해서, 자기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 물으시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고 하셔. 가장 우선적으로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라는 거야 그러면 그 이외에 모든 것은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라고 말씀 하시지. 


간단해.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에 집중 하면서 먹고, 입고, 마시는 일 하며 스트레스 받지 말라는 거야. 


그럼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이라고 주장 하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이 무엇일까? 


“시험성적 올리는 걸까?” 

“기독교인으로서 영향력을 넓혀야 하니 검사, 의사 등 ‘사’자 들어가는 직업인?” 

“사회에 모든 것 포기하고 교회에서 살면서 전도만 할까?” 

“유명 일류대 입학인가?”  


요즘에 이단삼단 하면서 사회를 시끄럽게 하는 어떤 종파처럼 학교, 직장 그만 두고 사람들 모아서 교회 데려가기 위해 포교활동만 하면 될까? 


예전에 나도 경험한 어떤 교회의 목사님도 그러셨어. 교회가 가장 우선이기에 교회 이외에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지. 심지어 성도들에게 집의 재산을 모두 가져 오라셨어. 믿음을 본다나? 주일(일요일)에 아프면 병원도 가면 안 된다고 하셨지. 주일은 쉬어야 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조하셨기 때문에 물건을 사는 일도 병원에 가는 일도 문제로 치부한 때가 있었다. 이유는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지. 


그 당시에는 정말 큰 믿음인가 보다 하고 생각하고 일천 번째 예배부터 새벽예배까지 모든 게 교회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고 움직였던 시간이 있었다. 그런 생활을 하면서 많은 분들을 만나고 공부하다가 나중에 깨달은 게 있어. 바리새인들이 그것보다도 10배는 더 한 삶을 살았다는 거야. 그런데 예수님은 왜 그들을 그리더 싫어 하셨을까? 하는 의문점이지. 심지어 이들은 주일에는 일하지 말아야 한다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발자국 수까지 세가면서 인내했거든.  


우리에게 신앙생활의 본질에 가까이 가려는 노력은 무엇일까? 그 기준은 이미 수천 년간 쓰인 성경에 모두 있다고 믿어. 다만 성서라는 것은 그 시대의 역사와 문화가 존재하기 때문에 현 시대정신에 입각해서 해석하지 않으면 정말 큰 문제가 발생한단다. 


어찌 됐건 다시 생각해 보자. 


시험기간에 교회를 나오지 않고 입시 성적을 올리려고 하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교회 나오는 시간도 고작 해봐야 1시간 예배를 포함해서 오며가며 1시간 정도 거의 두어 시간 걸리는 건데.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헌납하라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힘든 걸까? 


공부를 하는 것도 그래. 기독교인이 입시성적을 올려야 하는 본질은 무엇일까? 


내 경험 수준에 맞춰 조금은 알겠다만 ‘이렇게 살아라’ 하고 답을 내려 줄 수는 없는 것 같아. 솔직히 나또한 내가 현재 사는 삶이 성경에 쓰여 있는 것처럼 예수님이 원하시는 완전한 삶을 산다고 이야기 할 수 없거든. 신앙생활의 본질이 이거니 ‘너도 이렇게 살아라’ 하는 그 어떤 답을 가지고 있지도 못해. 


다만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최소한 일주일에 하루 정도 그것도 반나절이나 몇 시간이라도 내가 믿는 신에 대한 경전을 읽고 목사님 말씀 듣고 잠시 기도하는 시간조차도 지키지 않고 다른 일상생활이 무조건 우선이라는 것은 납득하기가 어렵다. 이건 신앙생활도 아니고 기독교인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은 확신하겠다.  


어떤 사람을 너무 사랑하고 그가 나를 너무 사랑하고 또한 그가 원하는 일을 하면 가장 행복해 진다고 말을 하고 다니는데 그 사람과 살지도 않고, 심지어 다른 이성을 만나서 딴 살림 차리면서 그녀(자)를 사랑한다고 이야기 하는 게 말이 되나? 이건 아닌 것 같아서. 


시험 잘 치렀으면 좋겠다. 다만 신앙이란 한번에 확신하기도 어렵고, 부흥회 등에서 확신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 말씀을 삶으로 살아가기는 정말 어려운 것 같다. 그래서 매주 하루 몇시간이라도 일주일을 돌아 보면서 나 자신을 생각해 보는 거야. 정말 잘 사는 게 무엇인지? 예수님께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강조하셨던 그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더 기도해 보고,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 봐야 하는 거라고 믿는단다. 


조금 오버해 보면 입시 공부 또한 주6일 동안 나름의 열심을 다해 최선을 다하고 최소한 주일 하루 또는 반나절 몇 시간이라도 하나님과 나에게 집중해 보는 것은 어떨까 싶어. 6일의 시간 동안 힘써 공부 하고, 독서도 하며, 영화를 보고 친구와 교재도 하는 등 세상적인 삶에서 성장하는 과정을 거치고 안식일인 주일 하루 정도는 나와 하나님 간 조금 더 깊은 시간 갖도록 예배 드리고 쉼을 주는 시간을 가져 보는 것은 어떠니? 여건이 되면 가정과 지역사회에 작은 봉사도 할 수 있으면 더욱 좋고. 


그런데 문제가 뭔지 아니? 일주일 내내 제대로 된 공부도 안하면서 두려움만 갖고 다른 친구들과 경쟁심에 쩔어 있다는 거야. 공부는 물론 제대로 된 친구관계도 안하고 어떤 집중할 만한 일이나 책을 보려고도 안해. 그러다가 시험 기간 맞으면 모두가 예민해지고 시험 성적 올리는 게 목적이 되는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는 청소년은 없을까? 정작 그 시간에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불안함만 키우는 일을 한다는 거지. 


다시 야곱으로 돌아가 보자. 야곱이 잘 한 것은 정말 좋은 것, 정말 중요한 것,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갖기 위해 집중했다는 거야. 에서의 문제는 자신에게 좋은 것이 주었음에도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우리에게 진짜 좋은 것은 무엇일까?


#아래 하트뿅뿅 클릭 글쓰는 사람에게 힘을 준다고 해요^^

  1. 창세기 25:22. 그런데 리브가는 쌍둥이를 배었는데, 그 둘이 태 안에서 서로 싸웠다. 그래서 리브가는 "이렇게 괴로워서야, 내가 어떻게 견디겠는가?" 하면서, 이 일을 알아보려고 주님께로 나아갔다. [본문으로]
  2. 창세기 25:23. 주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두 민족이 너의 태 안에 들어 있다. 너의 태 안에서 두 백성이 나뉠 것이다.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할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본문으로]
  3. 야곱은 "발꿈치를 잡다"라는 의미이다. 즉, 태어날 때부터 타인의 발꿈치를 잡고, 딴지를 건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그 이름에 담겨 있었다. 후에 야곱의 이름은 이스라엘로 개명된다(창32:24~32). [본문으로]
  4. 창세기 25:32. 32 에서가 말하였다. "이것 봐라, 나는 지금 죽을 지경이다. 지금 나에게 맏아들의 권리가 뭐 그리 대단한 거냐?" [본문으로]
  5. 마태복음6:25-34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