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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새길

내 마음 가는 데로 정리하는 신학 역사

by 달그락달그락 2016. 3. 20.


사진출처. 


종교개혁 이후 인문주의 운동이 도래했다. 르네상스(14-16세기)라는 문예부흥 운동이 일어난다. 어쩌면 중세에 암흑기 거치며 당연한 결과였다. 데카르트와 같이 ‘방법론적 회의’까지 튀어 나오며 세상의 모든 것을 끊임없이 의심 할 정도였으니 인간 개인의 이성에 얼마나 집착했던 시기였는지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옳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시기였다. 결국 생각하는 주체와 객체가 누군 인가에 집중하며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까지 나왔다. 



사진출처.불분명, 인터넷


이 당시에 당연히 ‘자유주의 신학’이 주류를 이룬다. 인간 이성에 기반 한 신학을 뜻한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이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일들은 현실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오병이어의 기적 또한 예수님이 뭘 뚝딱 만든 게 아니란 거다. 집회에 참여했던 아이가 자기 도시락 내어 놓으니 모든 이들이 먹을 것 내어 놓고 함께 먹었다는 이야기 등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는 거다. 


아는 것이 힘이었던 이성중심의 사회, 계몽주의와 합리주의 중심이었던 사회에서의 신학의 주류는 모두가 사람의 이성 중심으로 해석하며 몰아갔던 시기였다. 특히 이 바닥 운동권 출신 중에서 기독교 사회운동 한다는 사람들 꽤 많이 만나 봤는데 대부분 이러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사진출처.


1900년대 초반 합리적이고 이성 중심의 사고가 팽배했던 당시의 시기가 우리에게 엄청난 아픔을 가져 오게 된다. 1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1917년 레닌이 이끄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면서 인간의 이성에 기댄 사회가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를 깨닫게 된다.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 이성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강조하는 서양의 근대적 세계 이해해 기반을 두는 신학이다. 인간 이성의 능력으로 인류가 무한히 진보해 나갈 것이라는 이 당시의 믿음은 전쟁과 혁명 등 사회적 아픔을 겪으면서 무참히 깨져나간다. 당연히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문제는 불거진다. 





나는 한국기독교장로회라는 교단의 교회를 다닌다. 신학의 역사와 내용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 교단을 자유주의 신학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매도하는 이들이 있는데, 정말로 무식한 말씀(?)이다. 우리는 칼빈과 칼 바르트의 신학에 집중하는 교단이라고 배웠다. 



칼 바르트, 사진출처 


당시 이성이 지배하는 세상에서의 문제를 깨닫는 과정 중에 자유주의 신학에 철퇴를 가한 ‘칼 바르트’의 신학이 중심이 된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신학의 핵심이다. 칼 바르트는 종교 개혁적 신학을 다시 부활시키며 하나님의 절대적 초월성을 강조하는 신학을 전개했다. 보통 신 정통주의 신학(NEO-orthodox theology)라고 부르며 삼위일체론이 부활하는 전기를 맞는다. 


하나님의 절대적 초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유는 단순하겠다. 이성 중심의 인간이 모든 것을 합리화하며 교만에 쩔어 사회를 파괴했으니 말이다. 인간 사회의 교만과 불의를 비판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렇다면 다시 중세로 간다는 건가? 천만에 말씀. 이 사회의 정의와 함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신학적 가치를 중심으로 하게 된다. 칼 바르트는 정치적으로는 급진적인 사회주의자였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말 다했지 않나? 


이러한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의 사회 개혁적 관심은 1930년대 북미에서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사회복음(Social Gospel) 운동을 낳기도 한다. 



본회퍼, 사진출처. 


이후 독일의 본회퍼는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과 통합하고자 하는 신학적 사고를 하게 된다. 나치 정권에 대항해 저항 운동의 신학적 기초인 바르멘 선언을 작성하기도 하며 히틀러 암살 계획을 세우지만 체포되어 교수형에 이른다. 존경하는 신학자이자 목사님이다. 


이 분이 교수대에 오를 때 지켜본 간수의 증언으로 이사야 53장을 읽고 조용히 기도하신 후 당당히 교수대에 오르셨다고 전해진다. 이번 주가 고난주일인데 예수님과 함께 갑자기 본회퍼 목사님의 교수대 오르시기 전 모습이 상상된다. 갑자기 울컥한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사 53:5] 



평양 숭실중학교 시절 문익환(뒷줄 가운데)과 윤동주(뒷줄 오른쪽), 사진출처.


문익환 목사님, 사진출처


나는 70~80년대 기장교회에서 민주화 운동에 집중했던 그 힘겨웠던 기간을 이루는 신학적 이유를 여기에서 찾기도 한다. 


가톨릭에서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연다. 서방교회인 로마 가톨릭교회가 장차 앞으로 나아갈 길을 타진한 교회의 현대적 개혁이 이 공의회의 목적이었다. 이 때 부터 각 나라의 문화와 언어로 말씀을 전하게 되었고 토착화 신학이 이루어지게 된다. 


개신교에서도 이 당시부터 평신도 신학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고 이후 평신도제자훈련 또한 붐이 일게 되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과거 자유주의 신학적 관심은 기독교 교회와 신학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바르트 사후에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 



사진출처. 


1963년 영국 성공회 주교 존 로빈슨이 ‘신에게 솔직히(Honest to God)’와 세속화 신학논쟁, 70년대 들어오면서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의 여러 해방신학으로 이어진다. 당시 사회에서는 반전운동, 인권운동, 여성 운동 등이 크게 일어나게 시기였다. 


해방신학은 부분적으로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이 지주들과 군사독재정권에게 착취와 억압을 받으며, 라틴 아메리카 자체가 미국의 식민지적 역할에 고정되어 있는 사회문제에 대해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교회의 일부 진보적인 신학자들이 "하느님은 민중의 편에 서시는 민중의 하느님"이라는 신앙으로 반응한 것이다.1 


해방신학의 배경 무슨 말이냐고? 착취의 대상이었던 민중들이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삶에서 나타난 신학이란 것이다.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위한 예수님이 중심이며 현재 이 시대에 살아서 역사한다고 믿는다. 독재자들이나 식민지를 개척한 제국주의자들이 믿는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이다. 


80년대 들어오면서 신학은 삼위일체론과 구원론적 의미, 즉 인간의 구원과 창조 세계 구원을 말하기 위해 하나님의 초월과 내재를 함께 말할 수밖에 없음에 대한 신학적 재확인으로 이어진다.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세계의 이 세 영역에 대한 우선적 관점과 사고 등이 역사적 상황에 따라 나타는 것을 알게 된다. 1000년 이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나뉘고 최근 만나려는 노력이 있는 바, 동방의 ‘공동체’를 강조하는 풍조와 서방의 ‘일체’를 강조하는 관점 등이 잘 어우러지면 좋겠다. 


90년 들어오면서 신학은 ‘교회론’이라는 말이 튀어 나오게 되고, 친교공동체(communion)을 강조하게 된다. 인간과 자연의 소통, 조화로운 삶에 대한 고민,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드러내려는 교회다. 



# 교회에서 진행하는 '신학공부'하면서 짧은 시간 정리해 본 글입니다. 제가 현재 어떤 위치에서 어떠한 사고로 어떻게 세상을 보려고 하는지 고민이 많아지더군요. 혹시 목사님, 신부님 등, 또는 신학자 분들 이 글 보면서 문제나 안내하고 싶은 내용이 있으시면 언제든 댓글 부탁 드립니다. 오랫토록 교회 다니며서 제 안의 저를 많이도 보게 됩니다. 이 사회에서의 시대정신도 고민하게 됩니다. 안다는 것. 그 앎의 과정 가운데 믿음은 더 커집니다. 그 과정에 깊이 있는 내 안의 성찰. 곧 믿음의 성장이라고 생각합니다.

  1. 출처. 위기백과사전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