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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새길

사람을 더 많이 안다는 것

by 달그락달그락 2015. 3. 23.

내가 그 사람을 안다면서 자신보다 못하거나 아래에 두면서 이야기 하는 이들을 종종 본다. 그 사람이 상당한 위치에 있음에도 예전에 자신의 동네에서 아는 동생이라거나 학교 후배였다면서 무시하는 듯 한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목사님들도 말씀 전하기 어려운 대상이 가족이라고 한다. 이전에 알고 있었던 친구나 깊이 교재 했던 사람들도 힘겹다고 한다. 자신을 잘 안다는 듯 한 태도를 취하며 ‘너나 잘 하세요’라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지.

 

어렸을 때 함께 어울려 놀던 후배나 동생인데 집까지 가난해서 조금 무시했던 녀석이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대학총장이나 기업의 사장이 되어서 나타났다면 어떨까? 그 사람의 위치나 명예에 맞게 존중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을 것 같다. 무시하거나 존중하지 않는 태도의 이유가 그렇게 될 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인지, 아니면 배가 아파서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다.

 

성경에도 이러한 비슷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들어갔다. 말씀을 전하고 환자들을 치료한 모양이다. 많은 이들이 잠시 놀랐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예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서 말하였다.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모든 것을 얻었을까? 이 사람에게 있는 지혜는 어떤 것일까? 그가 어떻게 그 손으로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까?

 

더 놀란 것은 이전에 자신들이 아는 목수의 자식이라는 것에 놀람과 함께 비웃음이 섞여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 그는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이전에 내가 아는 천한 목수 자식이라는 거다. 그리고 현재에도 동네에 함께 살고 있는 그의 동생과 누이들을 너무나 잘 안다는 거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그 귀한 가르침과 기적을 눈으로 보았으면서도 말이다.

 

사람을 알면 알수록 싫은 경우가 있다. 외면적인 모습 특히 입으로 하는 이야기와 실제 삶이 다른 이중적인 사람을 알았을 때다. 사람을 알면서 싫어진다는 것은 겉과 속이 다른 것을 알았을 때다. 이와는 반대인 경우도 있다. 처음에는 비호감이었으나 알면 알수록 선한 일을 하면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이들에게는 갈수록 호감이 생긴다.

 

사람을 알아 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오락가락이다. 그 사람을 알아 간다는 것이 삶의 비전을 보는 것인지, 나를 대하는 태도인지, 이전에 나와 한 동네에서 살면서 느꼈던 그 어떤 관점인지, 그 사람이 쓴 책을 읽어서 안다는 것인지, 도대체 사람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기준 잡기가 쉽지 않다.

 

 

사람이 사람을 모두 안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해 보인다. 가장 큰 문제는 여기에 있다. 내가 상대를 알지 못하고, 모두 알 수도 없으면서 모두 안다고 여기는 것이다. 깊이 만나고 함께 산다고 해도 그 사람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기는 이미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사람을 몇 가지 경험하거나 단편적인 모습에 따라 자신의 잣대로 틀을 가지고 상대를 규정짓는다. 그리고 그 틀을 통해서 그 사람은 그 틀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설정해 버린다. 상대를 자신의 잣대 속의 크기로 규정해 버리는 것이다. 특히 자신이 어렸을 때나 친한 관계에서 알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서 더 크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더 웃기는 것은 어디 대학 출신인지에 따라 상대방을 규정짓는 이도 있고, 직업이나 신분에 따라 마음대로 규정지으면서 상대를 판단하는 이도 있다. 참으로 무식한 짓이다.

 

사람을 진짜 안다는 것은 사랑하는 과정인 것 같다. 사람을 알아가려고 노력하는 그러한 과정 자체가 안다는 것 아닐까? 알아 간다는 것은 나의 잣대와 틀을 없애고 그 사람 관점으로 보려는 노력이다. 사랑을 해 본 사람들은 안다. 사랑은 상대가 무엇을 좋아 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려고 노력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밀당 운운하지만 진짜 사랑하게 되면 눈에 보이는 게 없다. 최소한 나는 그랬다. 뵈는 게 없지. 암. 그 사람이 모두이고 그 사람이 좋아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사람을 안다는 것 또는 알아 간다는 것은 이러한 사랑의 과정이다. 진실 되게 사람을 관계하며 알아 간다는 것은 어떠한 이해관계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고 함께 하려는 노력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만나는 것이다.

 

 

청소년들을 만나오면서 사람을 안다는 것에 대해 더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이가 사고 쳐서 부모가 상담할 요량으로 데려온 경우가 많다. 아이들과 대화해 보고 부모들을 만나보면 자기 자녀를 가장 모르는 게 부모인 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그러한 부모들이 자신의 자녀를 모두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만의 틀을 들이대며 그 안에서만 아이들을 보려고 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게 된다. 그 틀도 매우 작고 색깔까지 덕지덕지 칠해 놓았으니 더욱 보이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 틀은 바로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포장되어 있는 탐욕덩어리였다.

 

상대를 알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사회라는 공간에서 일을 하면서 신뢰의 관계를 형성하기 어려울뿐더러 어떠한 감동도 기쁨도 갖기가 어렵게 된다. 더불어 일의 시너지나 효과도 높지 않을 것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해 주고 자신의 어쭙잖은 관점으로 상대를 평가하는 한 말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밖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는 법이 없다." 예수께서는 다만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고쳐 주신 것 밖에는, 거기서는 아무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다.

 

고향사람들을 위해서 귀한 말씀과 기적까지 행했지만 한다는 짓이 비루한 목수 자식이라는 비아냥거림이었다. 자신의 틀 안에 딱 가두고서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결국 다른 지역에서 수 없이 넘쳐 났던 기적을 그들은 볼 수가 없었다. 딱 거기까지였다. 그렇다. 사람을 나의 어쭙잖은 인식과 틀로 규정짓는 일을 나쁜 일이다. 삼가야 한다. 나부터 말이다.

 

 

마가복음 6:2-5 (새번역)

관점 사진 출처. http://letscc.net/detail.php?idx=53361&k=vision

틀 사진 출처. http://prologue.blog.naver.com/PostView.nhn?blogId=treewg&logNo=60123744349

 

 

150322 더 많이 안다는 것-정건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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