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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새길

공감 없는 큰 아들과 같은 우리들

by 달그락달그락 2015. 3. 15.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탕자의 비유(또는 되찾은 아들)는 많은 이들이 아는 이야기다. 부잣집에 두 아들이 있었다. 막내아들이 놀고 싶어서 아버지께 재산 분할을 요구했다. 요즘에도 부모님이 돌아가시지 않고 자기가 벌어 놓은 재산도 아닌데 돈 내 놓으라고 하면 비난받기 딱 좋다. 작살이 나거나 심지어 내 쫓길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더 심했나보다. 율법적으로 문제시해서 벌을 내릴 수도 있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재산을 나누어 막내아들에게 주었다.

 

막내는 이 돈을 가지고 먼 지방으로 가서 방탕하게 살았다. 심지어 창녀들과 뒹굴며 한 순간에 엄청난 돈을 모두 탕진하고 말았다. 때마침 지방에 흉년까지 들어 매 궁핍하게 되었다. 먹고 살게 없어진 막내아들은 그 지역의 주민 가운데 한 사람을 찾아가서 자신의 몸을 의탁했다. 주민은 막내를 돼지를 치는 일을 시켰다. 배가 고픈 막내아들은 돼지 밥인 쥐엄열매를 먹어야 할 정도로 배가 고팠다.

 

당시에 돼지는 가장 천하게 여기는 동물이었다. 가장 천한 돼지의 음식을 탐낼 정도였으니 막내의 상황은 너무나 힘겨웠나보다. 돼지 밥을 탐내다가 그는 깨닫게 되었다. 성경에는 그제야 ‘제정신’이 들었다고 표현한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제정신이 들다니?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누구나 아는 내용 아닌가? 더군다나 아버지에게 불효를 저지른 것도 알 테고 말이지. 자기가 죄 지은 것은 아는 모양이다. 한마디 더 중얼거린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라며 중얼거리고 나서 바로 아버지에게 찾아 갔다. 이 놈 참 뻔뻔하다.

 

 

그림. 잔스틴(1668-70), 탕자의 귀가

 

집에 가까워 오자 먼 거리에서 어떤 노인이 달려와 막내의 목을 껴안았다. 아버지였다. 막내아들은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하는데 노안의 아버지는 멀리서도 아들을 바로 알아보고 달려가서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춘 것이다. 아들은 바로 아버지께 용서를 구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이야기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바로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입히고 돌아온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벌였다.

 

큰 아들이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막내가 돌아와서 잔치를 벌인다는 이야기를 듣고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와서 큰 아들을 달랬다. 그러자 큰 아들은 아버지께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리며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장남에게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그런데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내가 큰 아이들이었다면 나도 이랬을 것 같다. 나는 아버지 아래서 열심히 일하면서 살고 있는데, 막내 녀석은 자기 재산을 모두 까먹고 와서 이렇게 잔치를 벌이는 모습을 본다면 말이다. 더군다나 밖에서 열심히 일하고 피곤에 절어서 집에 들어온 상황에서 이런 잔치하는 모습을 보면 더욱 화가 날 수도 있겠다.

 

우리는 여기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게 몇 가지 있다. 지금까지 이 구절을 읽고 들으면서 우리 모두가 집나간 막내아들 즉 탕자라며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 즉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게 했었다. 대부분의 설교 말씀의 '탕자=우리'라는 레퍼토리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막내아들(탕자)과 같이 행동하기가 쉬운가? 자신의 죄를 있는 그대로 고하고 죄송하다고 사죄하고 다시 돌아오기가 쉬운가 말이다. 형은 지금 아버지가 가장 마음 아파하고 그리워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또한 현재 행하는 일들이 과연 아버지를 위한 일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추측컨대 아버지 돌아가신 이후 모든 재산이 자기 것 되기를 기다리지는 않을까?

 

정리 해 보면 이렇다.

 

막내아들은 나쁜 놈이다. 하지만 회개하고 다시 돌아와서 아버지께 안겼다. 큰 아들은 세상 적으로 봐서 좋은 놈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자기가 행하는 일은 아버지가 아닌 자신의 입신을 위해서 열심히 하는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잘 못을 저지르고 힘겨워 하는 피를 나눈 동생에 대한 공감도 없다. 그저 동생은 자신의 권리를 빼앗으려는 나쁜 놈일 뿐이다.

 

당시에 예수님께서 큰 아들을 바리새인으로 비유한 대목으로도 읽힌다.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른 채 그저 자기 의에 취해서 아버지 옆에 있는 큰형의 모습은 바리새인과 닮았다. 아버지의 본심은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의 행위에서 의를 들어내려는 욕심에 절어 있는 모습이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 때문에 마음 아파했지만 다시 돌아 온 후 뉘우치는 아들을 보면서 크게 기뻐하고 잔치를 열었다. 큰 아들은 항상 옆에 있었지만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옆에서 자신의 의와 권리를 위해서 일해 왔다. 아버지는 알았을 것이다. 큰 아들이 몸으로는 옆에 있었지만 진심은 함께 하지 않았다는 것을. 누군가 내 옆에 있는데 그 사람이 그저 나를 자신의 기득권을 취하는 이용대상으로 여긴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다.

 

나의 현재 모습이 꼭 큰 아들 같기도 하고, 막내아들 같기도 하다. 아버지가 시키는 일이 힘들어서 가끔 일탈도 하고 있고, 잠도 못자면 행하는 일들이 소명이라며 미친척하고 추진하면서도 어떨 때는 나의 의를 들어내고 싶어서 환장한 놈처럼 덤빌 때도 있다. 모두가 나의 모습이다. 작은 아들보다도 큰 아들이 더 나쁜 놈처럼 보이는 것은 공감의 능력이 없다는 것과 아버지를 대상화 하는 모습이다. 동정심이 없다. 사람이 사람답다는 것 중 가장 귀한 감정 가운데 하나가 동정, 공감의 능력이 아니던가. 약하고 상처 입은 사람에 대한 공감, 자신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공감 능력 말이다.

 

우리 사회에 공감의 능력은 있을까? 나는 공감의 능력이 있을까? 행하는 일이 나의 의가 아닌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 하늘의 일이 모두라고 과연 떳떳하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 같다.

 

 

[출처.오마이 뉴스. 폭식투쟁하는 일베회원들]

 

세월호 이후를 기억한다. 어떤 이들은 상처 입은 이들에게 깊이 공감하며 함께 단식하기도 했지만 어떤 이들은 폭식 투쟁 운운하며 패악 질을 했다. 근래 미국대사 피습사건 이후 보수단체에 계신 분들은 촛불집회까지 열며 대사의 건강을 기원하기도 했다. 모두가 대사의 쾌유를 기원하지만 이런 이상한 행동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이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더라.

 

우리 사회가 아프다. 가장 아픈 이유는 진짜 아프고 상처 입은 사람들에 대한 공감능력이 갈수록 떨어지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갑질이라고 정리되는 일상적 행위들이 어디에서나 나타난다. 특히 을 중에 을들을 대하는 태도를 볼 때면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약한 이들에 대한 공감 없는 사회는 많이 아픈 사회다. 그러면서도 자기 일을 자신의 명예와 권리를 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며 약한 이들에 대한 공감을 왜곡하면서 빨간색까지 칠해 버리는 이들을 만난다. 탕자의 형과 같다.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른 채 바리새인 마냥 진정으로 돌보고 함께 해야 할 사람들에 대한 공감은 없이 강하고 힘센 이들을 추앙하고 찬양하며 빌붙어 뭣 좀 얻어 보려는 이들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약한 이들에 대한 공감의 능력은 필수다. 성경에서 우리가 그리도 본받고 싶어 하는 수 많은 분들의 모습의 대부분은 약한 이들에 대한 엄청난 공감과 동정에 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시작이고 우리가 만들어야 할 열매의 처음이 아니던가. 그리고 자신이 현재 행하는 일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는커녕 의에 싸여 아버지에게 대드는 큰 아들보다 자신의 부족과 죄를 용서하고 다시 돌아온 동생.

 

나는 둘 중에 누구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150315 공감 없는 큰 아들과 같은 우리들-정건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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