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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새길

사람보고 다녀야 하는 교회의 역할

by 달그락달그락 2015. 1. 11.




“교회는 사람보고 다니면 안 된다. 하나님만 보고 다녀야 한다.” 


교회 공동체에 힘들어 하는 몇몇 분들에게도 이런 식으로 전했다. 나 또한 이렇게 생각한 적이 많았다. 사람들에게 상처 받으면 그들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주장, 대다수 교인들이 전하는 이야기다. 이 말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힘겨운 이야기인 줄 나중에 알았다.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고, 그러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게 될 거라고 하셨다. 그런데 서로 사랑해야 할 존재들이 모인 공동체에서 사람 보지 말고 하나님만 보라는 게 말이 되는가? 너희들이 나처럼 사랑해야만 된다고 했고 그러한 공동체가 교회라고 했다. 이런 말이 뜻하는 본질은 공동체에서 실제 해야 할 책임을 방기하려는 모양새는 아닌가? 이러한 말들이 교회에서 일반화 되어 있다는 것이 너무나 힘겨운 일로 받아 들여진다. 


교회는 사람보고 다녀야 맞다. 하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적 가치를 넘어서는 삶이 있다고 믿는다. 그 삶을 보며 사람들이 모이고, 모인 사람들간의 깊은 교재 가운데 삶 자체에서 나타나는 세상적 변화들이 있어야 한다. 기독교인은 입이 아닌 삶 자체로 본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교회는 무엇 하는 곳일까? 사람 모으고, 돈 모아서, 집 짓고, 또 사람 모으고, 돈 모아서 건물 평수 넓히는 곳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맞는가? 복음전하며 선교하는 방식이 이러한 과정이라며 많은 곳에서 이리 주장하기도 한다. 교회는 전도해야 한다고 사람들을 모아 오라고 한다. 십일조 등 헌금 많이 내면 복 받는다고도 강조한다. 과연 옳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본질을 벗어나도 한 참 벗어났다. 


교회공동체는 크게 네 가지 역할을 갖는다. ‘예배와 교육, 친교와 섬김’이 핵심적인 역할이다. 예배와 교육, 친교는 공동체 내에서 긴밀히 이루어지며, 섬김은 흩어지는 교회로 공동체 외부에서 집중하는 일이다. 기독교인들이 모여서 함께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교회의 역할을 간략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케리그마(kerygma, μαρτυρια), 예배의 기능이다. 교회는 복음 선포를 한다. 교회의 핵심 역할이다. 성서에 기반 한 그리스도의 뜻을 선포한다. 역사와 시대정신이 살아서 움직여야 하며 삶의 원칙이 된다. 


둘째, 디다케(didache), 교육의 기능이다. 희랍어로 ‘가르침’이란 뜻이다. 열두 사도들을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전해진 예수의 가르침이다. 이를 줄여 열두 사도의 가르침이라고도 부른다. 교회는 성서에 기반 한 삶의 다양한 관점에서의 교육을 해야 한다.


셋째, 코이노니아(κοινωνια, koinonia), 친교의 역할이다. 코이노니아란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한다는 뜻이다. 성도의 나눔과 교제를 의미한다. 친교는 성도들과의 수평적 관계에서의 친교뿐만 아니라 수직적 차원인 하나님과의 영적인 친교도 포함된다. 영적 친교가 깊어질수록 성도들과의 친교도 깊어질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하나님과 성도만의 교재만을 강조하며 목회자나 교회 중직들이 성도들과의 교재에 힘쓰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거꾸로 영적 교재 없이 성도들과의 관계만을 키우려는 교재도 문제를 낳는다. 


마지막으로 디아코니아(διακονια, diakonia), 섬김이다. 가난한 자들과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에게 섬기는 일이다. 현재 우리사회의 양극화 문제와 약한 이들에 대한 복지적 지원문제들이 넘쳐난다. 말로만이 아닌 진짜 섬김이 무엇인지 살필 일이다. 특히 앞에 세 가지 예배, 교육, 친교와 다르게 섬김은 철저히 교회 밖으로 나타난다. 세 가지 역할이 이어져 흩어지는 교회의 사명을 다하는 과정이다. 


교회의 역할은 이러한 네 가지 역할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은 교회를 이런 역할을 하는 곳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입으로 담을 수 없는 수 많은 욕들이 난무하며 개독교 운운하는 이들이 많다. 세상을 따르고, 세상에게 경고 당하는 교회들, 교회내에서 도저히 일어 날 수 없을 것만 같은 범죄도 일어난다. 기가 막힌 일은 그러한 범죄조차도 은혜 운운하며 목회자를 비판하면 지옥 간다고 주장하는 이들까지 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일들이 소수의 일들이고 대부분 신앙을 잘 따른다고도 한다. 맞는가? 정말 모르겠다. 


예배를 통해 진정 하늘의 뜻을 구하고 깊이 묵상하며 삶으로서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교육을 통해서 내 삶이 바뀌어 경건성이 강해지는지, 교회공동체 내에서 친교를 위해 가슴을 열고 먼저 다가가며 함께 하려는 노력은 기울이는지, 세상을 섬기기 위한다며 현재의 일을 하지만 정작 나의 의를 들어내는 행위가 너무나 강한 것은 아닌지. 내 가슴을 들여다보더라도 교회 공동체로서의 역할에 너무나 크게 미흡해 가슴이 아플 지경이다. 


네 가지 역할에 집중하면 세상가치와 자꾸만 멀어지면서 결국은 소외당할 것이다. 그리스도가 철저히 자신을 소외시키고 인류를 구한 것처럼 세상가치와는 철저히 멀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낮은 데로 임해야만 구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낮은 곳에 있을수록 하늘을 더 크게 볼 수 있다. 영향력 운운하며 힘을 갖는 순간 그리스도의 근본적인 삶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은 우리 개개인의 삶이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우리의 삶으로 세상 가운데 드러나 보이게 한 것이다. 내가 공동체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죄로 연결되고 만다. 사람보고 실망하여 교회를 나오지 않거나 기독교를 비난하는 이들이 문제가 아니다. 그들에게 손가락질 받도록 이끈 우리의 죄가 문제다. 사랑 실천의 기준은 우리 개개인 모두에게 있다. 그리스도가 그랬던 것처럼 내가 너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는 것. 결국은 그리스도의 발가락 때 만큼이라도 닮아가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삶으로서 살아내기.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13:34] 



150111 사람보고 다녀야 하는 교회-정건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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