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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새길

값싼 은혜를 넘어서는 교회공동체

by 달그락달그락 2015. 1. 4.

교회에 운영위원회라는 조직이 있다. 일반 교회와 다르게 당회, 제직회, 공동의회 이외에 별도로 각 성도들 조직의 대표들이 여러 사안을 논의하는 조직이다. 운영위원회 제안사항을 당회와 당회장에서 제안하고, 그 사안들이 또 제직회에서 논의되어 결정된다. 과정에서 공동의회에 보고하는데 여기에서 또 문제가 있다고 하면 다시 제안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성도들의 참여다. 


교회 내에 말이 많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보이는 논의 구조서 당당하게 제안하고 결정되면 따르면 된다. 문제는 과정의 세부적인 사항을 이해하기 어려운 분들이 계신다는 거다. 연세가 있으시니 당연한 일이겠다. 이해를 못하시고 제안하면 또 설명해 드리고 논의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진행해 나간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함께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개방된 여러 논의 구조를 좋아하는 교회가 많을까? 단언컨대 그렇지 않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주장한다. 모든 교회가 그렇다. 대체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목사님 한분이 기도하면서 내린 그 어떤 결정만이 온전히 하나님의 뜻일까? 요즘 우리 사회 많은 교회들이 은혜로움 운운하며 이러한 결정구조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이 아닌 이상 이러한 한명의 자기 신념에서 기도하며 만들어진 결정이 완전한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교회에 여러 조직이 있으면서 정치가 있다는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라는 하늘의 뜻에 부합하는 관계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 즉, 하나님의 뜻은 교회 공동체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다시 반복하지만 교회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것에서부터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유의할게 있다. 교회공동체의 참여는 권한과 책임이 함께 한다는 것이다. 권한과 비판만을 강조하며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을 참여라고 오해하는 분들이 계신다. 참여는 반드시 자기 책임도 함께 따라 간다. 예를 들면 성가대 재정의 쓰임을 촉구하며 예산을 만들거나 다른 예산을 전용하자고 강조할 때 그 비판과 제안을 할 수 있는 권리도 있으나 반면 이 재정을 만들어 내야 하는 책임도 공존하는 것이다. 즉, 재정의 쓰임을 비판하고자 할 때 그 비판의 책임에 대한 대상 또한 교회공동체에 소속된 성도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돈 쓰는 것만 비판하고 돈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나 몰라라’ 하는 것은 교회공동체로서의 참여가 아니다. 교회 내에 책임져야 할 여러 일들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뜻은 내 자신의 신념을 의심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자기 신념의 의심은 공동체를 살리는 너무나 ‘생각’하는 과정이다. 내 판단이 전적으로 옳을 수 없음을 우리는 누구나 안다. 하지만 공동체의 관계에서 서로 간에 미묘한 자기 생각들을 주장하다 보면 반드시 감정적 손상을 입기 마련이다. 성숙한 공동체는 이러한 감정적 손상을 슬기롭게 이겨내고 선한 뜻 안에서 함께 가는 것이다. 


내가 절대로 옳다는 자기 신념의 확신에서 공동체의 문제는 발생하기 마련이다. 신께서 우리에게 자율권이라는 가장 귀한 선물을 준 이유는 생각하여 선택할 수 있는 힘을 준 것으로 이해된다.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은 자기 신념을 의심하는 과정인 것이다. 나의 알량한 신념을 넘어서서 도대체 하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살피는 과정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끊임없이 해야 할 일이다. 그 과정은 기도와 함께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내 주변의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소통하면서 얻는 자기 신념의 비판적 과정이라고 믿는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했다. 우리는 과정 가운데 그 어디에 삶을 산다. 누구나가 여행객이다. 이 세상에 내 것이 있나? 나는 단언컨대 없다고 믿는다. 분쟁이 있는 조직에 가장 크게 침투해 있는 생각은 그 어떤 것이 ‘내 것’이라는 데에서 만들어 지더라. 내려놓는 힘이 진짜 힘이다. 조직을 공동체를 깨지 않는 가장 중요한 힘이다. 


사랑과 진리는 항상 함께 간다. 사랑과 정의도 함께 간다. 사랑 없는 진리를 상상해 보았는가? 은혜롭다며 모든 것을 두루 뭉실 안고 갈 때에 공동체의 폐해는 극단적이 된다. 근래 우리사회의 대형 교회의 치부를 보면 알지 않는가? 사랑은 모든 것을 포용하지만 진리 없는 사랑은 종국에는 사랑도 헤치고 만다. 값싼 은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 공동체는 더욱 솔직하게 개방하고 사랑을 중심으로 조금은 더 치열하게 진리를 논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정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과정은 아닐는지. 


새해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복지사업에 대한 찬반의 문제와 예산에 대한 논의 과정에 참여하면서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여러 논의가 성숙한 과정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면서 하늘의 뜻이 어디에 존재하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된다. 성도는 사랑과 진리 안에서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 참여하며 함께 하는 과정에 있어야 한다. 한두 명의 힘을 가진 이들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고 공동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논의 없는 것이 분쟁 없다는 것으로 여기면서 뒤에서 조용히 군 시렁만 되는 일들을 은혜롭다고 하는 짓들은 그만 해야 한다. 


은혜는 절대로 값싸지 않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눅 9: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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