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 치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3 ”는 말씀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부분 기도하고 간구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강조했던 말씀으로 이해하고 있다.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유럽최초의 교회인 빌립보교회에 전한 편지글의 한 부분이다. 우리가 이해하기로 예수님 믿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거다. 누군가와의 경쟁가운데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그 어떤 힘도 포함되어 있다고 배웠다. 그런데 그 ‘뭐든지’와 ‘예수님을 믿는 방법’ 가운데 바울이 전한 뜻과 전혀 다르게 우리 인간의 모든 세속적인 욕망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아나?
먼저 우리가 매번 간구하는 그 놈의 왜곡된 ‘뭐든지’를 살펴보자. 연말 되어 수능 칠 때 감사헌금 등이 이전보다 많아진단다. ‘특새’라는 특별새벽기도도 한다. 내 자식 좋은 대학 보내는 거다. 직장 취업문제도 그렇다. 취업뿐만이 아니다. 증권도 대박 칠 수 있고, 승진문제까지 연관된다. 이성문제도 좋은 배우자에 대한 기도는 당연하다. 심지어 수년 전 부터 좋은 말로 네트워크 마케팅 운운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사업이라며 다단계 피라미드도 횡횡했었다. 돈 벌어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두 이루어지기를 위해 최선을 다해 교회에 헌신한다. 교회에 헌신한다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방법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교회에 헌신하는 과정은 어떠한지 정리해 보자. 교회를 다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내용이다. 무엇이든 내가 구하면 하나님께서 다 준다는 것. 구한다는 과정은 기도로 응축된다. 말씀 안에서 살라고도 강조한다. 먼저 이런 모습이 우리 교회의 전체는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두자. 실제 성서의 본질적 가치를 따르기 위한 분들이 많이 계신다. 다만 비판 받는 상당히 많은 교회들을 예로 들겠다. 특히 성장했다는 큰 교회들의 모습들을 들여다보면 그 헌신은 단순하다. 일단, 무조건 사람 수 늘리면서 교회 건물을 넓히는데 집중한다. 건물의 화려함을 만들어 가는 일이다. 당연히 십일조 등 헌금은 교회건물에 집중해야 한다.
성직자들은 하나님의 종이므로 평신도라고 칭하는 이들은 성직자분들에게 어떠한 비판도 해서는 안 된다. 성폭력을 저질러도 그를 비판하는 것은 큰 범죄일 수 있다. 공금횡령해서 교도소에 다녀와도 당연히 목회는 이어진다. 그들을 심판하는 자는 하나님 이외에는 없다. 최선을 다해 예우하는 게 복 받는 길이다. 장로 되면서 목사 중형 세단 뽑아 주는 것은 이제 별로 큰 일도 아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로 치부한다. 선교라고 강조하며 땅밟기 한다며 관광회사 통해서 외국의 어려운 나라 여행가고 불상 앞에서 기도한다. 다른 종교상징물을 훼손하기도 한다. 돈이 조금 있으니 돈에다가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며 교회오라고 돈 나누어 주는 일까지 한다. 이 모든 일이 교회에 충성하는 일로 정리된다.
충성의 과정을 정리해 보니 내가 되고 싶은 것에 대해 기도를 집중하고, 이 기도를 들어 주기 위해서는 교회건물을 넓히면서 사람모아서 교회에 데려 오는 일과 성직자들에게 충성하는 일로 귀결된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이들이 일반적으로 주장하는 이야기라고 치부해도 된다고 자신할 수 있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개신교인들은 모두 안다. 영적인 그 무엇을 끊임없이 강조하면서 현실로 나타나는 일들은 이러한 과정이 대부분이다.
<그림출처. 삼학산진실연구소>
조금 비판적으로 정리해보면 무엇이든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욕심덩어리의 집합체와도 같아 보인다. 그 욕망 덩어리를 복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교회에 대한 그 무엇의 열심 또한 그 욕망과 연결되어 있다. 건물의 화려함과 규모를 위한 물질적인 제공, 성직자들에 대한 예우, 선교를 빙자한 외국 여행 등 또 다른 욕망에 매몰되는 일을 교회에 헌신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으로 주장한다면 너무 오버일까?
그렇다면 바울이 왜 이런 편지글을 썼는지 살펴보자. 위에서 비판적으로 서술했듯이 상당히 많은 이들이 우리의 욕망을 이 말씀 안에 투사하고 있는데 맞는 지나 확인해 보아야 할 것 아닌가. 우리가 비판하는 교회들이 이 말씀을 붙들고 욕망을 해소하는 도구로서 써야 하는 것이라고 해석되면, 지금처럼 자기 욕망을 그 말씀 안에 투사해서 살면 된다. 다만 그렇지 않다면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그렇다면 사실에 근거해 해석해 보자. 이 해석도 어쨋거나 신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닌 그저 태어나면서부터 현재까지 교회 다니는 집사 신분인자의 해석이니 쿨하게 인식하기를 바란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욱하거나 화가 난다면 그 이유도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다.
<바리새인들-복장재현>
당시의 바리새인은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었다. 신을 가장 잘 섬기는 사람들이었고 권력을 가진 지도층이었다. 당연히 예수 믿는 사람들과는 적이다. 갑자기 청년한명이 튀어나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최고로 잘나가며 신을 가장 잘 섬긴다는 힘 잇는 이들이 어찌 생각했는지는 눈에 그려지지 않는가. 우리는 바리새인들을 좋게 보지 않는다. 성경에 나쁜 놈들이라고 그렇게 쓰여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은 예수님의 제자 그룹들이 서술했다. 당연히 바리새인들은 나쁜 놈들로 서술되어야 맞다. 바리새인들에게 당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최고의 이단이었고 적이었기 때문에 핍박은 당연히 심했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바리새파였다. 이름도 바울이 아닌 사울로 잘 나가는 바리새파였다. 아이러니 하지 않나? 현재 우리가 바울이 쓴 편지글을 읽고 외면서 욕망하는 것은 당대의 바리새인을 되려는 노력 아닌가? 바리새인들은 당대 최고의 지도층이었고 엘리트였다. 요즘 말로 하면 고시를 몇 개 합격한 사람이라는 거다. 그런데 바울은 그 최고의 지도층 자리를 내려놓고 잡히면 모가지 날아가는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해 교회공동체 조직하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현재 우리가 욕망하는 기득권을 모두 내려놓았다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나? 우리가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며 자위하면서 욕망하는 그 모든 것을 내려 놓고 하나님을 따르는 바울의 이야기였다니 말이다.
더 기가 막힌 일은 예수의 제자 그룹이라고 하는 사도로 칭함 받은 베드로와 같은 이들과는 관계가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친위 부대라고 칭할 수 있는 실제 제자 그룹은 바울 이전에 사울일 때의 악행을 보아 왔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었나 보다. 바리새파로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 때 바울은 직장 시간이 아니어도 자기 시간과 돈을 들여서라도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는 일을 정말로 열정적으로 했다. 예수의 제자 그룹은 당연히 바울을 신뢰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심지어 바울의 선교지가 유럽 쪽으로 옮겨진 것도 제자 그룹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 만들어진 일이라는 신학자의 이야기도 있다.
바울은 많이도 외롭고 고되고 힘들었을 것만 같다. 또한 목숨까지 걸면서도 선교하는데도 예수님의 직계 제자 그룹의 인정이 없으니 더욱 힘들었겠다. 그래서인지 그의 글에는 자주 “나 사도가 말하느니…….”라고 시작한다. 누구도 사도라고 칭해주지 않으니 자기 자신이 “나는 그렇게 열심히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강조하는 것만 같다. 어찌보면 자화자찬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유념해야 할 일이 있다. 당시 예수의 제자로서 사도가 된다는 것은 곧 목숨을 내어 놓는 일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예수 믿고 복 받는다며 삼박자 축복 운운하는 이들이 사도가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빌립보교회>
바울의 뛰어난 점은 여기에 있다. 끌어 오르는 자기 열정을 올바른 곳으로 인도하면서 그 사역에서도 목숨을 걸며 최선을 다한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그 열정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자, 그럼 우리가 여기에서 집중해야 할 대목이 하나 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힌 후 유럽최초의 교회라는 빌립보 교회에 전한 메시지에 대한 해석이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빌립보서 4:12절(새번역) ”
그 다음 절이 그 유명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3 이다. 무슨 말인가? 우리가 원하는 돈, 안정, 권력, 위치, 이성, 건강까지 가지고자 하는 그 수많은 욕망 덩어리들을 금식하고 기도하고, 교회에 헌금 많이 하면 이루어 주신다는 것인가? 천만에 만만에 말씀이다.
12절을 보면 알겠지만, 바울은 지금 힘들어 죽겠다는 거다. 배부를 때도 있지만 비천하고, 배고프다는 거다. 핵심은 그 어떤 힘겨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공간에서 적응하며 견딜 수 있는 비결을 배웠다는 것이다. 여기가 포인트다. 그 다음 13절에 견딜 수 있는 이유가 나온다. 예수님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의 14절에 당신들이 나의 고난에 동참한 것 자체가 너무 잘 한 일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간단히 설명하면 사는 게 참 더럽고 힘들지만 적응하면서 견디고 산다는 것이다. 그 적응할 수 있는 삶의 힘이 예수 믿는데 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매번 부르짖고 기도하고 간구하는 그 욕망 덩어리들을 위해서 견딘다는 것인가? 단언컨대 그렇지 않다.
힘들지만 견디고, 적응할 수밖에 없는 예수의 길은 이웃에게 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수평적 관계에서 만나게 된다. 신을 사랑하는 행위 자체가 상처 있는 이웃과 만나고 있지 않는가? 바울이 진정으로 전하고자 했던 말은 여기에 있다. 예수 믿는 행위는 그 분에게 우리의 욕망을 투사해서 권력을 가지라는 뜻이 아니다. 이웃이 되라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내 힘과 내 욕망을 갖기 위한 그 어떤 권력욕을 위한 인맥 쌓기가 아닌 내 이웃이 되라는 것이다. 형제, 자매가 무엇인가? 가족이다. 여기에서 뜻하는 이웃은 가족이다.
교회에서까지 가족이라고 운운하지만 진짜로 가족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가? 내가 해석하는 가족이란 상대가 희망이 전혀 없어도 끝까지 붙잡는 게 가족이다. 우리는 그러한 가족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분의 제자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우리사회에 진짜로 이웃이, 가족이 필요한 이들이 누군인지 먼저 살펴야 할 일 아닌가? 내 욕망덩어리를 더 크게 부가하는데 예수님을 이용하는 짓은 더 이상 하지 말아야겠다.
예수님은 하늘의 자리를 내려와 가장 비천한 곳으로 왔다. 바울은 그 분을 따르기 위해 세상적 쾌락과 욕망의 정점에서 내려왔다. 우리가 빌립보서에서 알고 있는 성경적 가르침 안에서의 몹쓸 관점과는 전혀 다른 행위들을 한 것이다. 그가 행한 일은 자신의 세상적 신분에서 내려와서 비천한 삶으로서 목숨도 위태로웠지만 하늘을 위해서 행할 수밖에 없는 일들인 것이다. 우리가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그 위태롭고 힘겨운 그 공간에서도 바울처럼 적응하고 평안을 누리면서 살아야하지 않나?
우리가 집중해야 할 일은 여기에 있다. 타락한 교회에 또 다른 욕망에 집중하는 것이 신앙에 열심을 내는 것이며 무조건 복 받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조금 부족하고 힘겹고 살기 어렵더라도, 그럼에도 하늘을 위해 사람다운 삶을 살도록 노력하는 것. 내 이웃이 어디에서 고통 받는지 살피고 실제 함께 하려는 노력,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 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글을 쓰면서도 왜이리. 내 자신이 초라해지고 불쌍해 보이고 부끄러운지 모르겠다. 나는 예수의 제자인가?
150118 모두 할 수 있다는 거짓말의 의미-정건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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