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새길

충성해야 할 대상

by 달그락달그락 2015. 5. 17.

교회학교 청소년들에게 자신이 가장 충성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여덟 명이 전부 엄마가 첫 번째라고 대답했다. 두 번째가 아빠나 주변에 그 누구라고 했다. 충(忠)은 한자로 마음의 중심이라고 한다. 청소년들의 대답으로 보건데 그 중심에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집중하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렇지. 이 친구들 이야기가 맞다. 충성해야 할 대상은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야 맞다. 입으로만 사랑이 아닌 자신의 모든 것을 품고 안을 수 있는 진짜 사랑하는 사람에게 충성해야 한다. 충성은 사랑의 또 다른 언저리에 있는 의미로도 읽힌다.

 

문제는 나를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을 안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끔 아주 큰 시련을 주신다. 별에서 온 그대라는 드라마에서 천송이(전지현)의 대사는 압권이다.

 

 

“내가 이번에 바닥을 치면서 기분 참 더러울 때가 많았는데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 사람이 딱 걸러져. 진짜 내 편과 내 편을 가장한 적. 인생에서 가끔 큰 시련이 오는 거 한 번 씩 진짜와 가짜를 걸러내라는 하느님이 주신 기회가 아닌가 싶다.”

 

이 말이 딱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전의 사랑이라고 알았던 이성 관계, 나를 좋아한다고 믿었던 친구와 직장 동료와 선후배 등의 관계를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다. 자신이 잘 나갈 때는 절대로 알지 못한다. 어떤 이는 자신의 진짜 모습보다는 자신이 가진 명함에 쓰여 있는 위치가 자신의 모습인 줄 알고 착각한다. 공직에서 은퇴하는 어르신들 볼 때 안타까움이 크다. 그 위치를 벗어난 이후에 사회적으로 자신의 진짜 모습을 마주한 후 힘겨워 하는 분들이다.

 

우리는 누구에게 절을 하고 납작 엎드리나? 직장에서 돈을 주는 사장이나 직장 상사일까? 엎드리어 공손히 대하지만 충성하고는 있나? 군대에서의 충성이라는 용어는 그 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 중에 가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충성’이라는 이 단어가 그리 긍정적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있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닌, 나를 대상으로 이용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뉘앙스로 받는 이들이 많아지는 모양이다.

 

충성해야 하는 대상이 있다. 그것은 우리 아이들이 말했듯이 바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사랑이란 너무나 광범위한 해석이 있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에게 가장 복되고 이롭게 도움을 주는 과정이 사랑이 아닌가 싶다. 그 복은 세상적 욕망이 아니다. 기독교적 가치에 따르면 나를 가장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뜻 그 자체이다.

 

“그리스도는 아들로서, 하나님의 집안사람을 성실하게 돌보셨습니다. 우리가 그 소망에 대하여 확신과 자부심을 지니고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집안사람입니다(히 3:6).” 히브리서 말씀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결국은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그 어떤 존재의 곁에 있어야 한다. 나를 자신의 피값으로 샀다는 그 어떤 존재를 믿고 의지하며 그 뜻이 무엇인지 간구하는 한 우리는 가장 큰 충성의 대상을 이미 아는지도 모른다.

 

교회는 공동체다.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는 것이다. 그 공동체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하다. 충성해야 할 대상에 대해서 알아가면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적 위치나 그 어떤 명예를 들이 데는 곳이 아닌 그리스도의 이유를 알기 위해서 나의 문제를 직시하고 그 분의 뜻을 알아가는 곳이다. 그 공동체에 미천하나마 함께 하고자 어떻게든 노력하는 것이다.

 

오래 전 교회의 목사님께 “제 딴에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공동체 주변에서 계속 맴도는 것 같다”고 여쭈었다. 지금 생각하니 내가 들어가지 못하는 그 어떤 벽 안에 있던 공고한 공동체 내에 있었던 몇몇 분들 또한 나와 비슷한 생각 했었던 것 같다. 공동체 내에 들어간다는 것을 다르게 생각해 보니 그 공동체의 누군가가 나의 행위와 태도를 인정하는 것으로 귀결이 된다. 돌이켜 보니 참 웃기는 말 했던 것 같다. 인정 관계가 아닌 진짜 공동체는 그 관계의 근본적인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함께 하는 것인데 말이다.

 

내가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라면 사람으로서의 인정을 구할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서의 가치와 이상과 비전에 따른 삶의 태도를 갖고서 맡겨진 그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다. 누가 알아주느냐 물을 필요가 없다. 사람은 반드시 한계를 갖기 마련이다. 모든 것을 알 수도 없으며 알아서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참으로 이기적인 것은 내가 원하는 그 어떤 좋은 것은 누군가 알아주고 인정해 주기를 바라면서 좋지 못한 것은 알지 못하기를 원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공동체는 이러한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인데 사람은 모두 알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인지 교회라는 곳은 매우 신성하고 경건한 곳으로 이해하지만 실상은 매번 갈등하고 비교하고 부딪치는 또 다른 사회로 존재하는 게 현실이다.

 

 

충성의 대상에 대한 결론은 우리 아이들이 이미 냈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집중한다는 것. 교회 공동체에서 충성한다는 것도 이와 결론이 같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이가 누구냐고? 이 글 읽는 당신도 알고 있지 않나? 예수님이시다. 자신의 핏 값으로 나를 샀다는 것을 믿나? 그럼 그 분께 충성하는 게 맞지.

 

교회 공동체에 왜 충성하느냐고? 그 분의 머리란다. 뭐 더 할 말 있나? 그럼 집중하는 거지. 문제는 그 분의 머리라고 우기면서 뻘(?) 짓 하는 이들이 섞여 있다는 것인데 그것 때문에 삐치고 갈등하며 공동체를 버리는 짓을 해야 하나? 그 ‘뻘 짓(?)’을 과연 누가 시켰는지 아나? 나를 가장 사랑하는 예수님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은 당시도 알지 않나? 그럼 왜 그 사람 때문에 갈등하며 공동체 전체를 힘겹게 하지? 그럴 필요 없다. 묵묵히 내가 집중해야 할 일에 집중하면 된다. 집사, 장로, 권사, 교회학교 교사, 주방, 주차 등 해야 할 일은 넘친다. 그 일에 집중하면서 나를 살리신 그 분을 보자. 쿨(?)하게 말이지.

 

#임직에 맞추어진 충성방법은 이어서……. 커밍 순^^;;;



150517 누구에게 충성하지-정건희.hwp


150517 누구에게 충성하지-정건희.hwp
0.02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