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날라 오는 메일들이 몇 있다. 상당수가 묵상, 명상 등의 생각할 글이다. 그 중 모 스님 님 등 몇 분 글들은 정리했다. 이런 스님, 목사님 등과 같이 도 닦는 분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속세에서 사는 나와 같은 민중들은 대부분 가르치고 지시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듯 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이 분들의 글을 자세히 뜯어보면 '말'은 '나긋나긋' 한데 대부분 ‘이래라, 저래라’의 지시형으로 충고하는 글이 대부분이다. 언제인가 부터 살짝 반감이 들기 시작했다. 청소년활동가로서 나에게 현장은 지역사회다. 이곳의 청소년들과 다양한 사람들은 나의 귀한 이웃이지 가르쳐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 어떤 곳에서든지 사람이 사람과 함께 하는 그 삶 자체가 귀하다고 여긴다. 계몽시키고 가르쳐야 할 타자가 아닌 나와 똑같이 삶을 나누고 함께 해야 할 이웃이라는 말이다. 시민들은 공감과 배움의 이웃이며 함께 성장하는 관계이지 지시와 가르침으로 대상화해야 할 타자가 아니다.
지인인 둥글이 박성수 활동가가 있다. ‘둥글이의 유랑 투쟁기’라는 책을 썼다. 전국을 걸어서 유랑하며 어린이들에게 환경을 보호하는 스티커를 나누어 주면서 캠페인을 했고, 강정마을에서 수개월 기거하는 등 사회의 아픈 곳에 찾아다니면서 권력자들에게 저항하며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현장 중에서도 조금은 더 치열한 곳에 들어가서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변화 시키고자 노력하는 활동가다. 앞에서 제기 했던 스님 류의 글보다 둥글이 박성수 선생님의 활동하는 모습이 최소한 나에게 만큼은 배울 게 더 많아 보인다.
오래전 문정현 신부님께서 환경 관련 워크숍에 초대되어 대담에 참여하셨다. 사회자와 대화 중 문 신부님이 갑자기 세상의 중심이 어디냐고 물었다. 청중으로부터 배꼽부터 머리까지 다양한 답변이 나왔다. 그러자 문 신부님은 사람 몸의 중심은 아픈 곳이라고 하셨다.
가슴도 머리도 아닌, 아픈 곳. 몸이 아프면 그 곳에 모든 신경과 생각이 집중하면서 중심이 된다고 설명해 주셨다. 그래서 세상의 중심도 ‘아픈 곳’이라고 하셨다. 당신께서는 언제나 세상의 중심에 있으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가슴 울리는 말씀이었다.
지난 주 익산의 새벽이슬이라는 기독교 청소년단체의 대표인 김윤근 목사님과 식사하면서 대화했다. 오래된 지인이다. 금요일마다 청년들과 예배를 드리는데 주요한 키워드는 삶이라고 했다. 청년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소리 내어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질은 성경말씀을 삶으로 살아 내는 것이라고 강조한다고.
세월호에서 아직 나오지 못한 분들의 이름을 아느냐며 팽목항이나 목포신항에 한번이라도 가 보았느냐고 묻는단다. 삶으로서 말씀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지역의 이슈나 약자들의 문제가 있으면 캠페인도 하고 어떻게든 몸으로 참여해 보려고 노력한다고 하셨다. 비영리 단체 운영하며 밖에서 잘 하지 않았던 현장의 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가르침에 배움을 얻는다. 다만 가르침만 있고 삶이 없는 경우, 또는 말과는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을 알게 될 때에 배신감을 갖는 경우가 있다. 자기계발류의 서적들과 강연에서 수많은 지시형의 문구들 만나면서 깨닫는 것은 그마저도 개인의 수익을 위한 어떤 트렌드에 갇혀 마구 내 지르는 배설물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최소한 나에게 만큼은 타자에게 배설물이 아닌 양식이 되기 위해서는 내 뱉는 말이 삶으로서 살아질 때이다. 본받고 싶고 존경하는 분들은 말이 아닌 몸으로 살아내면서 삶 자체로 소통하는 분들이다. 자기계발류의 지시가 아닌 자기 삶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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