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판적 시각이 강한 사람이(었)다. 공부할 때도 그렇게 훈련 받았고, 시민사회운동 특히 청소년운동 하면서 문제를 거론하고 비판하고 변화 시키려고 집중 한 일들이 많았다.
강의하고, 토론하고, 회의하고, 모임에서 대화하는 등의 일을 많이 했는데 그 안에 비판적 시각은 언제나 내재해 있었다. '운동'의 속성상 어떤 가치와 이상이 존재했고 그 시대의 어떠한 정신이 있었으며 이를 위반하는 정책, 정치, 사회적 관계, 조직(기관) 내부의 문제는 당연히 비판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내 안의 욕구 또한 내가 가진 종교의 가르침에 따른 비판의 대상이기까지 했다.
공격적인 질문과 비판적 질문은 외부 뿐만 아니라 내 안의 나를 향해 있었다.
"나는 어떻게 변화할 수 있을까?",
"타자(개인, 사회, 지역, 공동체 등)를 어떻게 변화 시킬 수 있을까?"
'변화'가 매번 내 안의 화두였다. 근 10여년 가까운 정치적 환경에서 뉴스 보는게 고역이었고, 이에 근거해 페이스북이나 신문사 기고하는 칼럼 등은 정부정책 등의 비판적 관점이 강했다. 비아냥도 섞여 있었다. 내가 관심 갖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비판적 관점에서 내 안의 사유 운운하면서 성찰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힘들었다.
가끔은 잠도 못 잘 정도로 힘겨웠다.
타자에 대한 비판의 과정에서 그 '변화'라는 것은 당연히 상대의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모두가 옳다고 여기는 정의와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일임에도 변화는 반드시 저항을 수반했다. 그 저항을 이기려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또 다른 내안의 힘이 있어야 했다.
신앙적 관점에서 내 안을 내가 비판하고 다스리고 욕구나 욕심을 눌러 내는 과정도 고역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작년 인가? 몇년 전인가? 모르겠다. 언제부터인가 저항의 힘이 또 다른 힘으로 다스려 지는게 아님을 알게 되었다. 변화는 내가 수단이 될지언정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이미 무수한 책이나 현장의 경험에서 그러한 내용을 알았다고 여겼지만 아니었다.
안다는 것이 안다는 게 아니었다는 거다. 그저 머리로만 알고 있었을 뿐 삶에서 체화되어 나타나는 형태는 바뀌지도 않는데 매번 또 다른 변화를 추동하기 급급했다.
지역에 다시금 연구소(달그락달그락) 셋팅하고 가치 실현의 과정에서 플랫폼을 강조하고 사람들의 관계형성에 집중한다지만 과연 그럴까? 또 다른 변화에 집중하는 나를 자주 마주하게 된다.
어제 청년이음 세미나에서 질문연구소 박영준 소장님이 소개해 준 칼로저스의 글귀가 계속해서 맴돈다.
"초기 (상담)전문가 시절에 스스로에게 내가 '어떻게 사람을 다루고, 치료하고, 또는 변화시킬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을 했던 것이 이제는 '어떻게 내가 이 사람에게 자기자신의 인간적 성정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관계를 제공할 수 있을까'로 바뀌었다." - 칼로저스.
나는 또 공부하고 안다고 하겠지? 아는 게 아는 게 아님을 나이 먹으면서 계속해서 깨닫는다. 안다는 것은 삶으로 체화하기 이전에 안다고 하지 말아야 함을 알게 된다. 또 나를 비판하는구나. 비판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 비판의 근원에 있는 내 안의 나를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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