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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및 관점/강의 및 연구

가르친다는 것은 소통하는 것이 아닐까?

by 달그락달그락 2011. 7. 6.

지난 주 청소년들 대상으로 '지역사회 참여'에 대한 주제로 교육했다. 두 달여 전에 의뢰 받고 일정 고민하다가 허락했었다. 몇 주 전 참여하는 청소년들에게 주제에 대해 강사에게 묻고 싶은 게 있으면 질의하라고 했다. 주중에도 제주의 청소년기관장들과 관계자들 중심의 강의가 있었다. 참여하시는 분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강사에게 질의할 내용을 정중히 여쭈었다.

 

강사가 수강생들 찾아 여쭙는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터인가 '강의'를 소통이라 여겼다. 전문적이고 훌륭한 지식을 간추려 자세히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 순간 재미있고, 감동이 있는 이야기,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실성, 흥미로운 동영상, 흥겨운 몸짓, 억양까지 강의에 들어가는 수많은 기법과 내용들이 있다. 밤을 새워 강의를 준비하고 전문적 기술이나 새로운 정보, 찾기 어려운 여러 사례들을 모으고 이론과 내용을 설명해도 수강생들과 관계가 없는 경우 허무하게 마치는 경우가 있다. 자발적이지 않고 의무감으로 참가한 대상자들을 위한 강의나 프로그램 진행은 힘겹다.

 

내 안의 그 어떤 내용을 상대에게 쏟아 내면 좋은 것인 줄 알았다. 강의든 면담이든, 상담이든 간에 상대에게 좋아 보이는 것을 쏟아내야 했고, 쏟아 내야할 그 어떤 잘난 채 해야 할 내용을 찾아내며 가공해야 했다.

 

현장에서의 활동도 다른 이들이 경험하지 않았던 독특한 일들이나 힘겹고 치열한 삶 안에서 전달해야 하는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론적인 배경도 그에 따라 이어져야 했기에 찾아 읽고, 주워들은 풍월(風月)을 풀어 놓았다. 대단위의 청소년들 교육은 집중력의 약화로 민주시민교육방법론으로 시간을 조절해 때우는 경우도 있었다. 가슴 안에 끌어 오르는 그 무엇을 억누르지 못하고 눈물짓기도 했고, 나름의 경험을 전달하려는 노력도 했었다. 그 가운데 가끔씩 내가 뭐하나 싶을 정도의 공허함도 맛보았다.

 

교육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파커 J.파머는 제인 톰킨스의 '고통 받는 사람들의 교육학'이라는 에세이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학생들에게 내가 얼마나 똑똑한 교사인지를 보여 주는 것. 둘째, 학생들에게 내가 얼마나 지식이 많은지를 보여 주는 것. 셋째, 학생들에게 내가 얼마나 수업 준비를 충실히 하는지를 보여 주는 것. 나는 이처럼 세 가지의 연기를 해 왔는데, 그 진정한 목적은 학생들의 공부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나를 훌륭하게 생각하도록 유도하려는 것이었다."

 

이어 그녀는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하다가 우리 학자들은 그만 연기자가 되어버린 것일까?" 그녀는 그 대답은 공포라고 말한다. "사기, 우둔, 무지, 어색함, 바보, 비겁자 등 당신의 본질이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 그것이 이런 연기를 강요하는 것이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동안 해왔던 교육이나 청소년사업들을 유심히 돌아보게 된다. 강의는 연기가 아닌데, 어떤 이들은 연기하라고까지 가르친다. 과연 옳은 일일까?

 

가능하면 자신을 개방해야 하거늘 부족한 자기 모습을 노출했을 때 상대의 반응을 미루어 짐작하면 두려운 경우가 많다. 별로 내세울 것 없는 경력, 학력, 현재의 위치 등을 적절하게 포장해서 내세우기도 한다.

 

근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과학 고문인 칼 와이먼 교수는 사이언스지에 ‘누가 가르치느냐보다 어떻게 가르치느냐가 중요하다’는 내용의 연구 결과를 게재했다. 1주일 동안 한 반에는 저명하고도 노련한 교수가 전통적인 강의 방식으로 물리학을 가르쳤으며, 다른 반은 경험이 없는 대학원생들이 TV와 같은 장치를 통해 상호소통을 하는 ‘인터랙티브(쌍방향 소통하는)’ 방식으로 가르치도록 했다. 그 결과 도구를 이용해 인터랙티브 방식으로 물리학을 배운 반이 교수에게 강의를 들었던 반보다 시험 성적에서 2배에 가까운 성적을 기록했다. 아울러 출석률과 집중도가 인터랙티브 반에서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상호 소통하고자 하는 것이 교육의 중요한 과정이라면 결국 가르치는 자는 철저한 자기개방이 필요하지 않을까? 자신을 인정하고 당사자인 청소년들이나 학생들과 수평적 관계 안에서 끊임없는 소통이 필요하지 않을까?

현재 내안에 가르친다는 것은 "아는 것, 경험한 것을 상대와 소통하는 것이며, 가르치는 나 또한 배우는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결국 가르친다는 것은 상호 소통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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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6일자 새전북신문 칼럼입니다.

 

http://www.youthauto.net/3571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71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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