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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는 이야기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by 달그락달그락 2011. 2. 22.

 

 

이태석 신부님 글을 읽었습니다. 근래 책을 보고도 여건이 허락하지를 않아 요약하거나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이 책은 짧게나마 감동받은 문구 정도는 남기려고 합니다. 어제 늦은 밤까지 읽으며 혼자서 눈물 흘리며 앉아 있었습니다. 이 분의 삶을 다큐로도 보고 요약한 신문기사도 보아서 대강 알고 있는 내용임에도 또 눈물 짓고 말았습니다.

글은 매우 쉽습니다. 글에 포함되어 있는 신부님의 삶을 투영하다 보니 감사와 기쁨, 그리고 슬픔이 공존하게 됩니다. 제 자신의 초라함도 보입니다.

 

주요한 내용을 간략히 작성해 봅니다.

 

끈질긴 인내가 최고의 무기이다. 31

나의 인내심을 단련시켜 키워 주고 나의 성소를 굳건히 지켜 주는 아이들이 바로 골통들이기 때문이다. 57

 

자신의 무기를 가장 잘 만들어 주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글에서 지적했듯이 우리를 힘겹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신부님은 '골동'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이러한 골통과도 같은 분들과 함께 하는 일 자체가 내 자신의 무기를 가장 크게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돈 보스코 성인의 말을 이용한 비유가 기억에 남습니다.

돈보스코 성인은 "청소년들과 함께하는 삶의 여정은 맨발로 장미 넝쿨을 걷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가시들 때문에 생긴 발바닥의 굳은살 덕에 미래의 험난한 정글을 그들과 함께 쉽게 헤쳐 나갈 수 있기에 가시처럼 많은 어려움 또한 감사할 수 있게 된다. 중략.. 혼자만의 여행이 아니기에 중략... 더욱이 항상 함께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124-127

 

청소년들을 만나는 힘겨움 때문에 자기 자신이 성소를 지켜주며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매번 버거운 일을 만날 때의 제 힘겨움을 너무나 어렵게 전달받아오던 때를 기억합니다. 힘겨움이 비교도 되지 않을진데 제 자신의 무지와 풍족함에서 오는 잘 못된 시각들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지금 내가 힘겨운가? 힘겨운 이들을 만나고 있는가? 딱 제 수준인 모양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하는 소풍이나 잔치 같은 삶이라면 이웃의 조그마한 시비나 무관심도, 이웃의 무심한 말 한마디나 작은 실수도 절대로 우리에게 상처를 줄 수 없으리라. 50

인간 생명의 고귀함을 모르는 '무식이'는 분명히 유죄다. 무식이 자신도 유죄이지만 무식이를 가르치지 않은, 그리고 무식이가 배울 수 있도록 여건을 허락하지 않은 우리 '유식이'도 무죄라고 발뺌할 수 없다. 215

 

무관심을 유도하며 현대사회에서의 인간관계라며 가르치기까지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무관심은 기독교인에게는 죄인 모양입니다. 그래서 힘겹고, 그 힘겨움 때문에 더욱 강해지는 선순환적 고리가 만들어집니다. 무식이와 유식이의 비유에도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알면 설명해 줄 의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긍정적 가치와 철학, 이념들 이에 따라 살아가는 귀하고 행복한 삶에 대해 알려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에게는 선택이 아닌 필수임을 믿습니다.

 

무소유와 가난한 마음 덕에 이들이 우리보다 행복을 더 쉽게 누리는 것이 아닐까. 중략. 우리가 가진 많은 것들 때문에 우리의 삶이 행복한 것처럼 착각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삶에 발린 많은 양념과 조미료에서 나오는 거짓 '맛'이지 실제 삶 자체에서 나오는 맛, '행복의 맛'은 분명히 아니라고 생각된다. 84

 

무소유의 의미는 너무나 다양한 의미가 존재합니다. 개신교인으로서 부끄러운점이 많습니다. 기복주의 신앙에 젖어 지금도 끊어내지 못하는 저 자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실제 삶의 행복이 무엇인지 더욱 깊이 성찰하며 제 자신을 다스려야겠습니다.

 

영혼의 전문가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최선을 다해서 만나고 최선을 다해서 대화하고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도 영혼의 전문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97

 

전문가 논쟁이 많습니다. 누가 전문가인가? 공식적으로 무엇을 잘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공인된 자격증이나 학위를 뜻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하는 전문가의 입장은 어떠해야 하는지 애매합니다. 그런데 이 신부님은 영혼의 전문가를 아주 단순히 정의합니다. 끝까지 인내하며 사랑하는 자를 전문가라 칭하십니다.

 

기도는 들어줄 때까지 끝까지 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인지 아이들은, 제발 고등학교를 열어 달라고 끈질기게 수년간을 졸라댔다. 134

 

'예수님이라면 이곳에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까, 성당을 먼저 지으셨을까?' 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 것 같다. 사랑을 가르치는 성당과도 같은 거룩한 학교, '내 집'처럼 느껴지게 하는 정이 넘치는 학교, 그런 학교를 말이다. 137

 

복음을 전파함에 있어 교리서나 성경에 있는 내용을 주입하는 것을 넘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을 통해 주위 사람들의 영혼을 건드려 움직이게 하고 감동하게만 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완벽하고 발 빠른 복음화가 또 있을까 싶다.

 

내 주위의 이웃을 위해 드러나지 않게 행하는 작은 희생과 봉사가 이웃들에게 예수님의 모습을 보다 더 쉽게 느끼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90

 

그리스도인의 언어는 말이 아니라 행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멋진 말로 사람들을 감동시킬 순 있어도 영혼을 감동시키거나 변화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영혼을 감동시키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두 영혼의 진실한 만남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상대방의 영혼이 우리의 진실한 삶을 통해서, 우리의 진실한 눈빛을 통해서 예수님을 느끼거나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그들의 영혼에 작은 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96

 

신부라는 직분을 가지신 분이 성당과 학교 중 예수님께서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 거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고개를 갸우뚱했는데 이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곳의 배움의 절박성과 함께 아이들이 학교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학교 자체가 학교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교회와도 같은(오히려 더욱 교회같은) 다양한 역할이 가능한 공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학교에서의 실질적인 변화를 보며, 아이들이 기도하게 되고 예수님을 찾게 됐다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어떠한 건물이 아닌 존재하는 곳 자체가 교회일 수 있습니다. 또한 복음을 전하는 방식 또한 되돌아 볼 만한 일이라 여깁니다. 근래 전도 자체가 너무나 공격적이다 보니 역으로 유탄을 맞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삶 자체가 복음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을 그대로 이해하게 됐습니다. 우리 나라에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도 처음부터 교회만 지었을까요? 제가 알기로 그렇지 않습니다. 학교와 함께 병원 등 실제로 민중들에게 필요한 곳을 짓고 그곳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올바른 가치를 가지고 헌신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교육과 함께, 그들의 삶 자체가 복음이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근래에는 어떻습니까? 실제 이러한 복음적인 삶을 사시는 분들도 계시나 입으로는 복음을 주장하는 당사자의 삶 자체는 전혀 다른 모습을 목격하기도 합니다.

 

교육은 이 곳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129

 

교육은 삶을 바꾸는 핵심적 행위입니다. 올바른 교육이 중요한 때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청소년들에게 삶의 바른 안내를 위한 교육은 필수입니다.

 

우리가 고생할 줄 뻔이 알면서도 웅덩이가 있고 고개가 있어 쉽게 빨리 달리지 못하는 길, 때로는 진흙탕에 빠져 한참을 한곳에 머물러야 하는 길, 중략... 미래를 위해서 좋은 길을 주시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리 달릴 수 있는 길, 평탄한 길에만 집착하는 고집스러운 인간들을 가르치기 위해 하느님 스스로도 골고타로 향하는 길, 십자가의 실을 택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58

 

제 모습이 그나마도 이정도가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정도의 수준인 것입니다. 그 정도의 힘겨움과 그 정도의 십자가 정도에 이정도의 모습이 만들어짐을 알게 됩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울며 불며 하나님께 요구하는 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저의 비천하고 무지하고 부족한 모습입니다.

 

선의의 경쟁을 하나의 덕으로 여기는 경쟁 사회에서 상대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무관심'은 하나의 덕으로 여겨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의 시각에서 '무관심'은 엄연히 죄악이 아닌가 생각된다. 169

 

많은 사람들이 많은 재물의 주인이 되기만을 원할 뿐 자기 행동의 주인 되기를 꺼려 한다. 178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희망을 잃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면 사랑을 잃은 이들에게 사랑을 주는 데에 그들이 가톨릭이나 개신교면 어떻고 이슬람교면 어떤가? 그들이 우리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서 꼭 우리가 믿는 종교로 개종해야 한다는, 내 안에 잠재된 강박적인 사고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194

 

'종교는 인간을 구속하는 정신적인 틀이 절대 아니다.'고, '오히려 인간을 더 자유롭게 만드는 정신적인 해방의 틀이다.'는 것을 외치기 위함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194

 

그들을 개종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뻔히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 그들을 안아 주며 위로해 주실 것이라 생각한다. 결과나 수치, 틀에 박히지 않는 예수님의 깊고 넓은 사랑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진정한 선교가 아닐까. 196

 

우리의 참되고 투명한 외적인 삶의 모습을 통해 비치는 내적신분증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아차릴 수 있는 그런 진정한 '고르놈' 말이다.205

 

무엇보다도 강한 힘을 지닌 것은 그 가치 있는 순수한 것들을 물질주의가 만연한 이 세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는 사람들의 고귀한 '똥고집'이 아닌가 226

 

개종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뻔히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숫자에 얽매이지 않고 가장 아파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일이 선교라고 강조합니다. 선교를 위해 기도합니다. 복음을 전한다 합니다. 누구를 비판하기에 앞서 제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정말 고민입니다. 눈뜨면 어설프게 이불 뒤집어 쓰고 기도하지만 모두가 저와 가족, 기관의 실무자들과의 관계를 위한 기도입니다. 더군다나 조만간 실행하려고 기도하고 있는 일들이 선교적 삶인지 다시 한번 돌아 보며 기도해야겠습니다.

 

부족한 제 모습만 적나라하게 들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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