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의 시대
정건희 (군산시청소년문화의집 관장)
크리스마스다. 술집, 노래방, 모텔 등 유흥업소는 초만원이며 다른 날보다도 술에 취하는 이들이 많다. 예수 탄생일인데 예수는 없고 산타가 어느새 그 자리의 주인공이 되었다. 선물을 주고받으며 기업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철저히 마케팅 도구로 사용한다. 예수가 현대에 다시 태어나 이러한 모습을 본다면 기가 막혀 할 것 같다. 신의 아들이면서 인간의 몸으로 말구유에 태어나 이 땅의 인류를 구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는 사라지고 산타를 중심으로 흥청망청 휴가를 즐기는 시간이 되고 말았다. 그의 뜻을 기리는 것은 종교적 행위로만 남고 말았다.
크리스마스와 더불어 연말이면 여러 기관단체에서 많은 봉사를 행한다. 이러한 내용의 기사가 지역 언론에 연일 올라온다. 추측컨대 일 년 동안의 봉사활동보다도 12월 한 달 동안의 활동기사가 더 많아 보인다. 모두가 없는 이들을 위해 봉사를 한다고 하지만 봉사활동의 정의에 비추어 엄밀히 말하면 ‘지속성의 원칙’에 위배된다. 이 때문에 봉사가 아닐 수도 있다. 또한 대상자와 봉사자의 수평적인 관계 형성이 아닌 일방성에 의해 자신들의 이득을 만들어 가려는 수단화되어지는 기부봉사 행위가 분명히 존재한다. 봉사를 도구화하는 왜곡된 행위에 불과하다.
다른 해와 달리 2007년 12월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대기업 CEO로서 국가를 기업적 마인드로 성장시키고자 하는 분이 당선되었다. 당선자의 핵심 논리 중 한 가지는 ‘성장’을 통해 비정규직, 사회양극화 문제 등 참여정부에서 실패했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한다는 논지다. 이러한 근거의 합당함을 찾기 위해서 이전 정부의 경제가 성장하지 않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하지만 IMF이후 한국의 경제지표는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어 왔다. 대한상의와 통계청의 자료를 살펴보면 기업들의 재무구조는 전반적으로 크게 개선되었다. 1000대 기업의 부채비율이 외환위기 직후 347%에서 83%로 크게 감소했으며 국민소득도 730조원으로 97년에 422조원에 견줘 73%증가했다. 외환보유액 또한 1997년 말 204억 달러였으나 2007년 10월 기준으로 2601억 달러로 13배 불어났다. 규모로는 세계 5위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경제대통령을 표방하며 성장을 중심으로 하는 대통령 후보가 당선되었다. 경제가 성장하지 못한 게 아니다. 핵심은 서민들의 안정된 삶을 찾지 못한 것이다. 일한 만큼 대가를 받을 수 있고 누구나 공교육 하에서 열심히 공부하면 자신이 원하는 진로를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원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참여정부에서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이야기하며 노동자들을 더욱 불안정하게 했다. 결국 기업은 살찌웠으나 일반 서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고 말았다. 참여정부의 실패를 그대로 국민들이 받아 안았으며 그에 대한 변화를 생각하고 경제대통령을 표방한 후보를 선택한 것이다. 서민들이 바라는 경제성장의 논리를 왜곡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근래 우리 지역은 새만금법이 통과되었고 경제자유구역이 선정되었다. 개인적으로 무척 고무적으로 받아들이다. 하지만 꼭 기억해야 할 몇 가지 논지가 존재한다. ‘국제관광기업도시“가 지자체 홈페이지의 메인타이틀이다. 군산시뿐만 아니다. 전국의 대다수 중소 도시의 목적은 기업하기 좋은 도시를 표방한다. 이 말의 뜻을 모르는 게 아니다. 하지만 모든 정책방향이 기업성장에만 맞추어져 있는 것이 우려스러울 뿐이다. 참여정부에서 국가경제의 성장은 있었지만 서민들 삶의 안정은 찾기 어려웠다. 지역 경제가 살아난다는 것이 노동의 유연성 운운하며 비정규직보호법과 같은 악법이 경제성장의 논리에 묻혀 일반화되고 서민들 삶의 안정화에는 별반 고민하지 않는다면 또 하나의 왜곡된 논리가 현실화 되는 것일 뿐이다. 지역의 인재양성을 행한다며 최상위권 몇몇의 학생들만을 지원하는 논리와도 유사하다.
서민들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경제를 성장시키기 위한 도구로서만 존재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경제를 성장시키는 것이지 기업하기 좋은 도시를 위한 도구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존재하지는 않는다.
다양한 시각이 언론과 미디어를 통해 많이도 쏟아져 나온다. 우리 사회에 왜곡된 논리와 시각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 또한 왜곡의 논지에서 완벽하게 벗어나기 어려움을 고백한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왜곡의 목적은 공동체 성장의 이타성에 기인하지 않고 개인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이기성을 발현시키기 위한 매우 큰 도구라는 것이다. 이것만은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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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전북 신문(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53307)에 실린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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