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하게 난 평화의 길은 없다.
정건희 (군산시청소년문화의집 관장)
예전에 아이들이 “왜 예수를 믿어야 해요?”라는 질문에 이런 말을 했던 적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낭떠러지에 떨어지려 하는데 넌 어떻게 하겠니?”
“어떻게든 못 가게 하겠지요.”
“그래, 머리채라도 잡아서 낭떠러지에 못 가게 막아야 하는 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지.”
“그 때문에 너를 교회에 데려가려 하는 거란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으면 안 되잖니?”
교회에서 목사님께 들었던 말이었고 참 빨리 와 닿았다. 교회에 전도한다는 명목으로 가끔 이야기 했던 말이었다. 그것이 맞는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근래 여러 교회의 선교 형태를 보면서 이 말이 얼마나 잘 못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낭떠러지에 못가게 해야 한다며 머리채를 잡다가 목을 비틀어 상대를 죽이는 경우를 여럿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도 낭떠러지에 가지 못하게 하셨다. 하지만 그 분은 머리채를 잡고 끄집어내려 하지 않았다. 상대와 사랑으로 소통했다. 머리채를 잡아서 끌 필요가 없었다. 상대를 인정하고 함께 하며 교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분 삶 자체가 상대를 사랑하며 섬기고 가장 낮은 곳에서 받아들였으며 함께 했기 때문에 상대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근래 탈레반에 납치된 분들에게 인터넷에서 온갖 악플이 넘쳐났다. 이분들이 당해야 할 일이 아닐 진데 지금의 한국교회의 공격적 전도 형태와 여러 모습들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압축된 시각으로 표명된다. 사학법 반대부터 친미, 근래 들어 정치적 개입의 모순까지 여러 좋지 못한 모습들을 보이는 일반적 시각일 수도 있다.
중동지역에서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는 선교단체들이 공유하는 백 투 예루살렘 운동은 이슬람에 대한 역사성을 상실한 평화적이지 못한 형태의 한 모습으로 보인다. 무슬림이 기독교에 개종하면 사형에 처하는 이슬람법이 있다. 무슬림과 극단적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다. 거기에 유대인 귀한 프로그램까지 지원한다고 한다.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 이스라엘의 정착촌들을 확대하였고 무슬림들이 조상대대로 경작했던 토지를 빼앗기는데 어느 누가 좋아할 수 있을까? 십자군 전쟁 이후 기독교에 대한 극단적 증오감에 휩싸여 있는 상당수의 이슬람권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관계회복 보다는 “예수 천당, 불신지옥”이라는 명제를 통해 단기적 변화를 추구하며 들어가는 선교에 대한 목적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을 방해하는 사역일 수밖에 없다. 몰역사적이라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단순히 사영리를 번역해 그 나라말로 해석해 주고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강조하지는 말자.
근래 외국여행이 자유로워지고 교회마다 여름한철 단기선교라는 이름으로 외국에 나가지 않는 교회가 더 작을 정도로 많이도 나간다. 과연 선교라는 명제에 적합한가? 잠시 외국에 나가 ‘땅밟기’라는 든지 ’영적 전쟁‘을 치르러 간다든지 하는 말을 이제 그만좀 하자. 교회 안에서 직분을 가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도 예수의 제자된 본질적 삶을 살기 어려워한다. 일주일 길게는 한 달여간 외국의 선교지라고 명명하고 떠나는 곳에 가서 문물 보고, 문화 탐방하며, 노방 전도한다며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 써가며 몇 마디 전하고 돌아다니다가 귀국하는 정도의 전도를 이야기 하며 크나큰 성과가 있었다는 식의 논리는 그만두자. 여름 한철 있는 시간동안 그 짧은 선교여행을 위해 기도는 얼마나 하며 돈은 또 얼마나 써 대는가? 단기선교에서 ‘선교’라는 말을 뺏으면 한다. “단기적 자기 훈련과정”이나 “선교를 위한 문화탐방여행”정도가 차라리 맞는 것 같다. 자신이 짧은 시간 외국에 나가 그 나라 문화를 체험하고 기도하는 정도의 여행일 뿐이다.
현재 질타 받는 교회에서 행하는 공격적인 전도의 모습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전하려 했던 복음을 위한 방법일까?
탈레반이 저지르는 현재의 악행들이 이슬람이 말하는 본질적 평화를 위한 행위인가?
상대의 문화를 철저히 무시하고 오만에 찬 자기우월의식에서 예수를 전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원하는 기독교인들인가?
선교사로서 표본으로 삼고 있는 훌륭한 분들의 공통점이 있다. 선교지에서 그 문화에 동화하려 무던히도 노력하며 수년간 그 나라에서 그 민족과 함께 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가르친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우리나라에 초기 기독교를 전하기 위해 들어왔던 선교사들의 삶을 보면 매우 단순해진다. 이와 달리 철천지원수라 믿고 있는 이교도들이 무턱 데고 그 종교를 자신에게 강요할 때 당사자의 극단적 반감은 당연하다.
현재 탈레반에 납치되어 있는 우리 형제자매들의 아픔을 더해 여러 모습들로 저주하며 힘겹게 하는 사람들을 인터넷과 언론에서 대할 때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다. 납치되어 있는 분들은 돌아와야 한다. 이 분들은 한 달여 동안 몇 마디 노방전도나 잠시 여행을 다녀오러 간 분들이 아님을 알고 있다. 실제적인 선교적 봉사의 역할을 행하기 위해 여러 준비를 하고 들어갔던 분들이다. 작년 대단위로 몇 천 명이 모여 이슬람에 가 집회를 열려 했던 선교단체와는 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하지 않을지라도 이 분들은 돌아와야 한다. 생명 그 자체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미 두 분이 순교하셨다. 나머지 분들은 돌아와야 한다.
남미 에콰도르의 마지막 남은 식인종 아우카족에게 복음을 전하러가 5일여 만에 살해당한 짐 엘리엇이라는 선교사와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로 알려진 토마스 선교사 두 분의 공통점이 있다.두 분 모두 선교지에 들어간 후 곧바로 처참히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분들의 피는 헛되지 않았다. 그분들을 통해 나중 그 민족에 복음이 전해 졌기 때문이다.
현재 탈레반에 의해 두 분이 순교했다. 그 두 분의 피 또한 과거 우리나라 초창기 토마스 선교사의 피 흘림일 수 있다는 믿음이다.
‘안전하게 난 평화의 길은 없다.’ 본훼퍼 목사의 말이다.
현재 탈레반에 의해 인질이 된 분들이 우리교회 선교의 과정에 너무 큰 값을 대신 치르고 있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위한 선교가 안전한 적이 있었던가? 전혀 다른 종교를 가진 민족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위험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더욱 공격적이고 우월적인 힘의 논리로 다가가려 해서는 안 된다. 현재 미국이 다양하게 행한 과정에서 이슬람권의 모습을 보면 극명하지 않은가? 우리의 선교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가르치셨 듯이 타인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지속적으로 함께 하며 참 사랑을 실천할 때 실제적인 복음이 만들어진다. 그 복음을 전하는 것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격적이고 급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께서 직접 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먼저 예수 닮기를 행해야 한다. 우리의 선교가 상대에게 그리스도의 평화를 이루기 위한 것인지 우리의 이기성을 채우기 위한 것인지 생각해 보면 매우 단순해진다. 단, 그 평화를 이루기 위한 힘겨움은 제국주의적 힘의 우월에서 공격을 행함에 있어서의 힘겨움이 아닌 예수께서 하셨던 것처럼 나를 죽이는 힘겨움이 녹아있어야 할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 [마: 5장9절]
'현장활동 > 청소년자치공간_달그락달그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9회째 진행한 군산YMCA 부활절 청소년연합예배 (0) | 2007.08.10 |
---|---|
내마음의 밑줄 하나 (0) | 2007.08.07 |
자율과 신뢰 (0) | 2007.07.16 |
인재지원과 인재를 키우는 차이 (0) | 2007.07.04 |
성공할 수밖에 없는 환경 (0) | 2007.06.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