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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활동/청소년자치공간_달그락달그락

설교하지 맙시다.

by 달그락달그락 2007. 4. 17.

원문: http://www.newsgunsan.com/ngboard/read.php?table=cul&oid=42&r_page=1&category=&searchword=&rd=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30608

 

설교하지 맙시다.

 

 

정건희 (군산시청소년문화의집 관장)


 

  아이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을 때 곧잘 듣는 말이 “설교하지 마라”는 것이다. 내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설교는 나에게 일상생활에서 밥을 먹는 것만큼이나 친근감 있고 꼭 필요한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설교’라는 뜻은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와 닿기만 하는 모양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설교란 나의 고민과 주장과는 상관없이 본질적 원칙에 의거해 상대방(또는 나)을 변화시키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교회에서는 설교가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본질적인 맥락에서 나오는 원칙적 내용이다. 하지만 많은 목사들의 설교들이 마냥 성경에 정통해 깊은 성찰과 기도를 통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여러 논란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평신도로서의 신학적 이야기를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이들이 설교를 너무나 싫어한다는 것이다. 교회에서의 설교뿐만 아니라 성인들이 늘어놓는 설교를 너무도 싫어한다. 성경을 원칙으로 하는 설교도 힘겹게 받아들이는 와중에 어른들의 설교는 천편일률적인 자기기만의 행복론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그 말들이 어른들조차도 잘 지키지 않은 채 아이들에게만 강요하고 있다는데 있다.

   모 대학에서 강의하며 물었다. 어른들이 술 마시고 밤늦도록 어울려 놀고 기분 좋아 노래방 가서 새벽까지 노래하고, 담배 피우고 밤에 야동(음란동영상)등을 본다면 무슨 행위인가? 몇 몇 학생들의 대답이 가관이다. “문화생활”이란다. 그럼 10대 청소년이 이러한 행위를 똑같이 행한다면 무엇인가? 대다수 학생들이 비행, 범죄 등 좋지 않은 말들을 쏟아낸다.

   아이가 도서관 가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늦게 들어간 모양이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힘들게 사는데 네가 공부하지 않고 나가서 놀 수가 있니?” 어머니가 나무라는 말의 핵심이다. 누구에게나 있을법한 학부모와 아이와의 대화 내용 중 한 토막이다. 부모가 일을 행하며 어렵게 사는 모든 일의 귀결점이 자식들에게 통해 있다. 자신이 고생하는 점 또한 아이들의 행복에 가 있다고 주장하며 그 아이들이 행복하기 위해 자신이 이렇게 힘들게 산다며 설교를 해 댄다. 아이들은 듣지 않는다. 진정으로 아이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부모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자신의 삶 모두를 아이를 위해 투영하며 살아가는 부모들이 우리 한국사회에는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괴리가 너무나 크게 존재한다. 자신들의 삶이 행복하다고 여기지도 않고 고생만 하면서 아이들이 행하는 모든 일들을 부모의 입장에서 제단하고 강요하고 지시하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자신들(부모, 성인)의 삶이 그리 행복해 하지 않고 삶의 목적을 맹목적인 재산불리기에 취해 있으면서 아이들에게도 그 순간의 행복보다는 먼 미래의 나중 행복을 위해 지금은 오로지 입시를 위해 매진하라며 강요하며 설교한다.

 

   교회에서나 법당에서의 설교는 인정이 된다. 바른 원칙에 의해 내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성인들이 행하는 설교는 교회에서의 말씀이 되어서는 위험하다. 설교를 행하는 부모들이 그러한 바른 원칙과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그 기준이라는 것이 고작 사회에서 출세주의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며 일류대학에 대한 목적으로 점철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바른 기준도 원칙도 아닌 오로지 자신들의 물신숭배만이 가득하게 남아있으며 아이들은 그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맹목적인 부정과 반대만을 가슴 가득히 묻고 있으면서도 끌려가듯 그 곳에 따라 움직이고 만다. 그리고 자신이 불행하다며 갈등한다.

 

   중요한 것은 수평적인 소통이다. 일방적이고 원칙 없는 설교가 아닌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부모든 성인이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듣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무원칙의 설교가 아닌 “수평적 소통”만이 아이들을 살리는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봄이다. 새싹이 돋고 맑은 하늘이 보기 좋다. 따뜻해진 날씨와 청명한 하늘을 보는 것은 좋지만 청소년운동을 하는 나로서는 봄 날씨로 인해 마냥 기분이 좋을 수 없다. 아이들이 집을 나가기 좋은 계절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오늘도 아이가 가출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고교 때부터 단체 활동하던 아이의 전화였다. 사촌 동생인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지금 있는 곳을 알고 잡으러 간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상황을 보니 기나긴 아버지의 설교가 주요했던 모양이다.

 

   따뜻한 봄날 부모님들에게 꼭 해 줄 말이 있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해 하십시오. 그리고 아이들에게 설교하지 맙시다. 집 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