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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활동/청소년자치공간_달그락달그락

비보이(B-boy)와 지역교육

by 달그락달그락 2007. 2. 1.

비보이(B-boy)와 지역교육


 

정건희 (군산시청소년문화의집 관장)

 


   근래 청소년들 사이에서 비보이(B-boy)는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광고 등 상업적으로 많이도 내 보인다. 불과 몇 년 전 가수 뒤에서 춤동작을 조금 따라하는 정도의 백댄서라 칭하는 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외국의 굵직한 비보이 대회에서 상을 독식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업적 성장과 외국에서의 성공사례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많은 성인들은 할 일 없는 청소년들의 그저 그런 하위문화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비보이에 배어 있는 의미가 평화적이며 안식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창조성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드물다.

 

 

                                              [비보이-필더포스크루의 평화퍼포먼스]


  내가 아는 비보이의 역사는 재미있다. 1970년대 말의 뉴욕의 뒷골목은 흑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뒷골목에 남미의 경제 불황으로 먹고 살기 위해 불법 이민을 온 히스패닉 젊은이들이 많아졌다. 당연히 흑인들은 위기의식을 느꼈고 세력다툼으로 치열한 싸움이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브레이크댄스를 할 때만큼은 서로 간 휴전을 맺고 공격을 하지 않기로 했단다. 하지만 브레이크 댄스를 하면서도 고난위의 춤으로 상대를 공격하며 승리를 맛보는 일들이 많아졌다. 이로 인해 더욱 고난위의 춤동작을 만들어 상대에게 보이고 승패가 갈리게 되었고 배틀(battle:전투)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비보이 팀 간 기술을 보이며 승패를 결정짓는 명칭을 배틀이라 한다. 이러한 비보이 정신은 주체적이며 창조적일 수밖에 없다. 자유롭기 때문에 어떠한 구조적 틀이 있을 수 없으며 무대도 형식을 갖출 필요가 없다. 춤을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함께 하면 그만이다. 지하철 역, 거울이 있는 건물 로비, 불빛이 비추는 공원 등 어느 곳이나 그들의 무대일 수 있다. 젊은이들이 춤을 추는 바로 그 곳이 그들의 문화를 발산하는 세상의 중심일 수 있다.


  이러한 흑인과 히스패닉계 젊은이들의 배틀로 성장한 젊은이들의 춤을 우리 민족의 청소년들이 세계 최고로 성장하리라고는 그 당시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현재 우리 청소년들이 열광하며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는 이유를 생각해 봤다. 우리 청소년들의 사회적 환경에서 간단히 찾을 수 있었다. 극단적인 입시 경쟁체제에서 자유롭게 무엇을 꿈꾸고 실현할 수 있는 통로가 여기저기 모두 막혀 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입시에 성공하라며 강요 하지만 그 성공의 최상위 대학이 그들이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행복에는 맞지 않을지 모른다. 하루 10시간 이상을 책상에 앉아 친구를 경쟁상대로 힘겨운 일상사에 직면해 있는 우리 청소년들의 막연하고 불안한 미래가 예전 미국의 뉴욕 뒷골목의 청소년들의 갈등관계와 유사하다면 너무 큰 비약일까? 하지만 한 가지는 닮았다. 경쟁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해 바둥거린다는 것...이러한 막막한 환경에서 비보이(B-boy)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가치와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요즘 우리 아이들은 열광한다.

  세계의 한류문화를 주도하는 역할의 한 부분을 차지하며 정부차원에서도 육성하려 한 덴다. 이러한 비보이의 가장 큰 특징 한 가지는 그 누구도 청소년들에게 가르치지 않았고 청소년들이 자발적으로 기술과 내용을 채워 왔다는 것이다. 있는 것 그대로 따라하고 달달 암기하여 모방하는 문화가 아닌 세계 그 어디에도 없는 춤동작과 기술들을 자유롭고 창조적으로 자발성을 기초로 해서 만들어내 세계 제일이 되었다.
  이러한 비보이를 위한 지역사회 공공기관의 공간은 그 어디에도 없다. YMCA 등 청소년운동 중심의 한 두 단체에서 지원한 공간과 프로그램이 전부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보이를 현재 우리 성인들은 마음대로 이용하기만 한다. 지역의 축제와 이벤트에서 섭외 일 순위를 달리며 매번 메인 무대에 올리기 급급하다. 또한 상업적으로도 많이도 부각시키며 활용하기에 정신이 없을 정도이다. 이러한 현재의 환경을 비보이들은 좋아하지만은 않는 것 같다. 연습할 수 있는 공간도 거의 없을 뿐 아니라 재즈댄스나 현대 무용 등의 예술문화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지속적인 활동 공간이 없다는데 있으며 상업적 코드가 성장하여 비보이 정신이 퇴색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화려한 동작이나 외모중심이 아닌 비보이의 자유롭고 평화중심적인 기본적 정신이 소멸되어지려 하기 때문이다. 뒷골목의 힘겨움에서 행복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정신은 여기에 있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비보이의 모습과 현재 활발히 논하고 있는 우리 지역교육문제와 많은 연관성이 있다. 그 연관성을 갖게 하고 싶어 서론을 길게도 썼다.

   모 실업계 학교를 인문계로 전환하려 하고 다시금 평준화 해제 이야기가 나오며 상위 몇 프로의 아이들에게 더 많은 인센티브를 주려고 하는 등 다양한 교육정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모든 교육정책을 조금 거칠게 표현하면 엘리트 교육중심의 상위 5~10%정도의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을 위한 정책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공부에 대한 원론적인 이야기를 여기에서 논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서울대 가는 아이들도 우리 아이들이지만 지방 전문대에 입학하는 아이들도 우리 아이들이며 지역의 모든 아이들이 서울의 소위 일류대로 통하는 서울·연·고대에 모두 합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가정형편상 공부 할 수 환경이 전혀 되지 않아서 못하는 아이들도 있고, 만화나 운동, 또는 게임, 춤, 노래가 좋아 공부를 하지 않는 아이들도 있다. 실업계 학교를 인문계 학교로 바꾼다 해서 갑자기 지역의 모든 청소년들이 서울대 갈 수 있는 성적이 만들어 지는 것도 아니다. 또한 외국어고교와 같은 특수목적고를 지역에 많이 유치한다고 해서 교육이 낳아지는 것도 아니다. 모두가 알고 있다. 평준화를 해제한다면 한두 학교만 본래의 취지대로 학생들의 진학지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한두 학교를 위해 지역의 모든 인문계 고교가 과거에 비해 더욱 어려워질 하등의 이유가 없다.

   지역교육의 패러다임(paradigm) 자체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져야 한다. “서울대에 한두 명이라도 더 많이 입학시키면 지역교육이 잘 이루어지는 것인가?”라는 교육에 대한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서울대에 가지 못해도 연·고대에 가지 못해도 지역의 청소년들이 자신의 진로에 희망을 갖고 꿈을 꾸며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교육환경이 필요하다. 글로벌시대를 운운하며 외국어를 이야기 하지만 정작 외국어의 가장 중요한 도구는 입시의 목적이 주요하다. 외국어가 중요하니 모든 재정과 노력을 투자해 엄청난 예산을 들여 경기지역에 처음 시작한 외국어 마을을 만들려 노력한다. 그런데 외국어마을에 대한 효용성에 대한 검증도 되지 않았고 예산낭비라는 비판이 먼저 나오고 있는 와중에 똑같은 모습으로 타 지역의 모방만 일삼는 내용도 다양한 검증이 필요한 때이다.

 

  아이들이 행복한가? 미래에 행복할 수 있는가? 먼저 묻자.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벌써 타 지역의 특수목적고에 입학한 경우가 많다. 거기에 더 낳은 재정적 가정환경이 되는 아이들은 중·고교에 대다수 외국으로 유학하는 게 현실이다. 이 아이들 나름대로의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길이라고 보인다. 다양한 자기 갈 길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폄하하거나 나쁘다고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 공부할 수 있고 하려고 하며 우리지역이 아닌 타 지역의 다른 환경에서 공부를 하고자 하는 아이들은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지역의 모든 교육적인 패러다임 자체가 소수 그 아이들 중심으로 맞추어져 움직인다는 것은 너무 큰 과오와 문제를 내포할 수밖에 없다.

 

   비보이(B-boy)의 현재가 그렇듯이 본질적인 그 목적대로 교육의 패러다임을 고민해야 할 때이다. 아이들이 행복한 길, 천차만별인 청소년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다양성을 인정하며 그 다양성을 존중할 수 있는 길, 지역의 환경에서 충분히 가능하다.

   이유는 간단하며 명료하다. 교육의 최상위 목적은 인간의 공동체적 행복에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길 미래와 현재에 공존해야 한다. 그러한 아이들의 행복한 교육환경의 모습을 입시공부를 잘하는 소수의 아이들 중심에서 이제는 모든 아이들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패러다임으로 바꾸어 고민해야 할 때이다. 그 다양성의 정점에는 비보이와 같은 자유로움에서의 창조성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자발적인 자신들의 행복한 세상을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먼 미래의 소수 일류대학만을 졸업하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가치에 맞는 꿈을 희망으로 바꾸어 현실에서의 행복을 맛볼 수 있는 바로 그 교육적 환경이 필요한 때이다.

 

 

                                               [비보이-필더포스크루의 퍼포먼스]

 

 

본 칼럼은 군산뉴스에도 중복게제합니다. 

 

원문:

1편 ( http://www.newsgunsan.com/ngboard/read.php?table=cul&oid=22&PHPSESSID=9ae2a6d528daa569ce4733b3d2d20736 )

 

2편 ( http://www.newsgunsan.com/ngboard/read.php?table=cul&oid=25&r_page=1&category=&searchword=&rd=&PHPSESSID=9ae2a6d528daa569ce4733b3d2d207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