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인과의 경쟁에서 이기면서 누리는 행복이 있다. 소유다. 자본주의의 본질과 같다. 이와 반대로 경쟁에 저항하고 소유와 상관없는 활동을 통한 행복도 있다. 경쟁과 소유라는 자본주의 강박을 넘어설 때 느끼는 또 다른 감정이다.
소유가 아닌 무소유다. 어떤 이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자기 소유가 없는 상태라고 주장하는데 단순한 이해다. 어느 철학자가 그랬다. ‘무소유’의 ‘무’는 동사의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우리가 많든 적든 가진 것, 즉 ‘소유’가 전제된다.
‘무소유’는 내가 가진 ‘소유’를 줄여 나가는 일이다. 가진 것, 생산하는 것을 줄인다는 것은 타자에게 그만큼이 또 흘러간다는 것을 뜻한다. 이때 느끼는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어떤 뿌듯함 이상의 가치가 있다. 인간만이 누리는 감정이다.
자연은 언제나 그렇게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서 커진다. 하늘의 그 작은 빗물이 모여 높은 산에서 작은 물줄기가 되어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 인간만이 낮은 곳의 아주 넓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자본을 끌어올리며 몇 안되는 이들이 모든 것을 소유(하려고)한다. 물질주의 끝판이다.
저녁에 비전 후원이사회를 했다. 좋은 사람들과 곧 있을 달그락 모금캠페인 준비와 일일찻집, 플리마켓 등 행사 준비를 했다. 작은 무소유를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이들과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나누고 관계하여 공동체를 만들고 그 안에서 누리는 ‘정’이 흐르는 관계의 그 충만함을 아는 분들이다.
“수단과 목적이 일치하지 않으면 ‘노동’이고, 반대로 수단과 목적이 일치되면 ‘놀이’다.” 요한 하위징아가 쓴 ‘호모 루덴스’에 쓴 글이다. 수단과 목적이 같은 사람들을 만나면 활동은 놀이가 된다. 오늘 저녁에도 그랬다.
가끔은 중노동이라고 여기는 일도 있지만 내가 하는 활동은 놀이가 되기를 바라고 있고, 그런 시간이 더 많이 쓰려고 노력 중이다. ‘현재는 수단이면서 목적’이어야 옳다. 놀이의 시간관이 아니라 ‘현재는 수단, 미래는 목적’이라는 노동의 시간관이 지배할 때 불행해진다.
일하는 이 순간도, 이 시간에 이런 글을 끄적이는 이유 중 하나다. 현재를 살아야 한다. 자본주의 병폐에 매몰되어 끝없는 경쟁과 소유욕에 잡혀 들어갈 때 괴물이 된다. 경계하고 경계할 일이다.
오늘은 무슨 날인가? 쓰다 보니 윤리책 수준이 되어 가고 있음. 여기서 멈춰야 해. 오늘도 좋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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