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전 아흔을 바라보시는 권사님이 종이컵에 맥심 커피를 타 오셨다. 지난해부터 두 아이가 방송 봉사하는데 옆에서 도움 주며 앉아 있는 게 예배 중 주로 내가 하는 일이다. 가끔 헌금봉헌도 한다. 두 아이가 장비 다루는 일이 숙달되어서 내가 하는 일은 별로 없다.
권사님은 매번 아이들 음료도 챙겨 주시면서 나까지 커피 타 주신다. 너무 죄송하고 황송해서 그러지 마시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는데도 오히려 나에게 그러는 거 아니라고 하신다. “내가 몇 년이나 이렇게 커피 한잔 타 줄 수 있겠어?”라면서 환하게 웃는 황 권사님. 나는 이분의 존재만으로 교회가 어떤 곳인지 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녔다. 나는 선데이 크리스챤이었다. 신을 알았다기보다는 일요일이 되면 교회를 가야 하는 게 가족 문화였다. 청소년기에 학교보다도 교회 친구들과 많이 어울렸고, 심지어 고3 때에 대입 전 백일주도 교회 후배들이 사 줬다. 물론 어른들 모르게 행하는 몇 년 동안의 희한한 전통이었다. 교회는 나에게 가장 개방적이며 진보적인 곳이었다.
학교와 다르게 교회에서 만나는 어른들은 무조건 환대해 주셨다. 초등학교 때에 교회 여선생님의 그 환한 웃음을 아직도 기억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학생이었던 것 같다. 얼굴 까맣게 타고 코 흘리며 때긴 손톱으로 짓궂게 장난치던 아이들을 교회학교의 그 짧은 시간 동안 예수님 알리 위해서 최선을 다했던 선생님이셨다. 그 시간이 좋았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선생님의 미소와 그 순간의 분위기가 따뜻했다. 교회에서 처음 여자친구와 교제하게 되었고, 기타 치며 이성 친구들과 어울리는 장소였으며 연극과 음악공연을 몸으로 알았다.
좋은 사립학교라고 들어간 곳에 몇몇 교사는 거의 매일 학생들 두들겨 패는 곳이었고, 싸움 잘하는 학생의 순위가 정해져 있는 조금은 폭력적인 곳이었다. 반면 교회는 여자 청소년들이 더 많았고, 내 부족한 감성과 인간관계를 조용히 형성할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었다. 친구들이 같이 가자고 하는 부흥회와 집회도 따라다니면서 내가 믿는 신이 누구인지 어설프게 알곤 했다. 당시 교회 다닌다고 하면 착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좋았다.
취업 후 가장 혼란스러운 청년기에 가슴으로 만난 예수님. 인격적으로 신을 만난 이후 내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직장도 지역도 옮겨서 다른 일을 하게 됐다. 지금 행하는 현장의 청소년활동이 그때 결심한 일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현재 이 모양(?)이 되었다.
20대 삶이 몹시도 혼란스러울 때 만난 교회는 매우 보수적이었고, 그 안에서 방언과 여러 은사를 알았고, 그곳을 통해 보수적인 신앙관을 가진 분들의 집회나 부흥회에 참가하면서 나는 점차 변해 갔다. 최근 연세중앙교회에 청년들이 탄핵반대 집회에 조직적으로 참여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청년기 그 교회 담임목사가 훌륭하다고 권면 받아 집회, 수련회에 참석하고 윤 목사님 책까지 사서 읽었다. 그들이 운영하는 기도원에 여름 수련회에 갔을 때 사회 현실을 영상으로 보여 주는데 노조는 빨갱이 수준이고 시민사회단체는 거의 반국가적인 조직으로 묘사되었다. 아직도 그때 영상을 기억한다. 노조가 어떤 존재인지 현장에서 알고 있었고 내가 하는 활동이 시민사회단체이기도 했기에 반감은 컸다. 그래도 목사의 설교에 강단 아래서 나는 ‘아멘’을 외쳤다.
조용기, 전병욱 목사 등 수많은 보수적 목사의 책과 영상, 말씀까지 사서 들을 정도로 빠져 있었다. 나는 그게 신앙이라고 믿었다. 그 안에서 내가 말빨(?)이 좀 된다는 것을 알고 부흥사나 목사 하면 잘하겠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한번 해 볼까?’라는 생각까지 가졌다. 교회에서는 목사가 최고 슈퍼 울트라 갑이고 신과 가장 가깝고 누구도 건들 수 없는 존재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교회 건물 안에서 가장 좋은 직업, 높은 위치는 목사였다. 그러한 목사의 말에 절대 순종, 절대복종하는 길이 하늘나라에 상과 복이 넘치게 쌓이는 길이라고 배웠다. 나도 저런 일을 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잠깐 있었다. 탐욕이었다.
이상한 교회에서는 목사가 죽으라고 하면 죽는시늉도 해야 한다. 극단적이지만 전광훈이 빤스 목사라고 불리는 이유다. 집회에서 만난 윤(?) 목사는 회초리를 가지고 회중에 앉아 있는 이들 중 자기 성도라면서 변호사, 의사 등을 불러내어 종아리를 때렸다. 그러한 모습에 거부감 없이 웃으며 자연스럽게 여겼던 때가 있다. 교회에 목회자는 죽음 이후 영혼을 다루는 문제기 때문에 거의 신격화되어 있는 모습을 계속해서 확인했다.
내 삶의 반전은 그 신앙 때문에 선택한 단체에서 또 다른 기독교를 만나면서다. 활동하던 단체도 기독교의 미션을 가지고 있다. 그곳에서 관련 신학자를 만났고 독립운동부터 민주화 운동까지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활동했는지, 빈민운동, 노동운동, 노조 활동과 사회적 약자들인 가난한 자, 장애인, 여성, 어린이 청소년들을 위해서 어떻게 활동해 왔는지를 알게 되면서 갈등하게 되었다.
현장 활동하면서 전국에 수 많은 시민사회단체 선배들을 만났고 ‘운동’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서 몸으로 살아내게 되었다. 그렇게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면서 공부하고 내가 읽는 성경에 대한 해석과 내 삶의 활동을 계속해서 투영하게 되었다. 내 안에 스승도 만났다. 청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월남 이상재 선생님을 알게 되었고, 논문 찾아 공부했다. 문익환 목사님을 존경하여 그러한 삶을 동경하며 평전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읽을 정도가 되었다.
내 가슴으로 만난 신이, 이를 해석하는 신학이 얼마나 중요한지 자각하게 되면서 정 목사님 만나면서 현재의 교회를 다니고 있다. 정 목사님 만나면서 성경 공부도 조금은 깊어졌다고 여긴다. 그리고 최근에 부임하신 이 목사님을 만났다.
성경을 현실에서 공부하고 해석하지 않고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순간 문제가 발생한다. 목회자가 성경 구절 한두 가지 인용하면서 사탄·마귀 하면서 누군가를 공격하고 혐오를 조장하는 짓이 사회를 병들게 한다.
성경은 그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할지 자기 성찰과 사유가 필요한 일이다. 공부하고 토론하고 기도하며 살피지 않으면 ‘좀비’ 되기 딱 좋은 종교가 내가 믿는 개신교다. 그 누구도 아닌 내 삶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알게 됐다.
학부도 대학원도 다른 전공이고 ‘한국사’는 석사 수료만 한 전 모씨. 학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선생질 하려면 어느 수준의 공부는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수준으로 공무원 과목 중 한국사 시험 문제 잘 푸는 강의를 한다면서 ‘일타강사’라는 칭호를 받고 그 세계에서 유명해 진 사람이 있다. 최근에는 극우 유튜버로 유명세를 치르는 분이다. 이분이 세이브코리아라는 집회 강단에 올라 처음 한 말이 "나는 크리스천입니다"다 전 씨 말을 듣자, 사람들이 열광했다. 이유가 있다. 그들이 기독교인 정확히 말하면 보수라고 불리는 극우 개신교인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현재 전국에서 열리고 있는 집회 중에서 일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이는 ‘탄핵 찬성’ 집회의 반대 집회로 언론에서는 보수집회라고 하는 ‘탄핵반대’ 집회가 있다. 극우들이 모인다고 알려진 탄핵반대 집회는 대부분 종교집회라고 해야 옳다. ‘주여 삼창’이 울려 퍼지고, 알 수 없는 말로 소리 내 울면서 방언으로 윤석열 살려 달라며, 나라를 구하자며 기도하고 찬송가를 높이 부르는 이들. 대부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그 자리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그 배후에 조종하는 그들 교회의 담임목사들이다.
오래전 새벽예배, 일천 번째 예배 다닐 때가 있었다. 교회 짓는다고 헌금해야 한다고 해서 기한 맞추기 위해서 몇 년 붓던 적극 깨서 헌금했다. 목사님 말이 곧 하나님 말이었고, 교회를 떠나며 목회자 비난하는 이들은 모두 천벌 받는다고 했고 그 말을 믿었던 때. 그때의 내 모습과 현재 탄핵 반대 집회 나와서 울면서 소리쳐 기도하는 이들과 겹쳐 보인다. 비판과 성찰 없이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신의 말이라고 믿던 때다.
대구, 부산을 찍고 광주에서 열린 세이브코리아가 주관하는 윤석열 탄핵 반대를 위한 보수단체 집회의 참석자들이 예상외로 많다는 보도가 쏟아진다. 일단 거짓말이다. 사람의 수를 말하는 게 아니다. 보수집회가 아닌 극우 개신교인들의 종교집회에 가깝다. 거의 광신적인 종교집회라는 말이다.
이단, 삼단 주장하는 사이비종교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 가장 큰 보수교회 중 연예인 많다는 유명 목회자가 극우의 선봉에 선 목사와, 성소수자를 끊임없이 혐오하고 비난하는 사람과 함께 대형 교회에서 집회한다. 극우에 일부 개신교라는 말은 이제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개몽(령)과 계엄의 뜻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함께 쓰는 이들이 넘친다. 일부가 아닌 일반 교회의 문제로 보일 지경이다.
내가 그나마 이 정도 최소한의 시민의식을 갖게 된 이유가 있다. 삶 안에서 사회 참여가 주요한 활동이 일이었다. 역사적인 순간에 어떻게 참여하고 경험하는지가 중요해 보인다. 그 안에서 최소한의 공부를 하는 것. 입시 공부를 뜻하지 않는다. 최소한 교과서 수준의 역사와 문화가 어떤지, 초등학교 수준에서라도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정도의 기본적인 상식을 말한다.
상식 없이 누군가 시키는 것만 따라 하는 짓을 교회에서 할 때 어느 순간 그들이 믿는 예수님은 성경에서의 신이 아닌 가스라이팅 하는 목사가 만든 ‘맘몬’의 괴물이 될 수 있다. 성서에 복음서 어디를 살펴봐도 예수께서 약자를 혐오하거나, 자기 생각과 다른 타자를 총칼로 죽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나? 그런 적 없다.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했다. 무슨 신학의 수준도 아니다. 논쟁할 일도 아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우리가 따르는 신앙이다.
예배 시작 전에 막내 아들이나 손주 뻘 되는 어린 사람 위해 커피 한 잔 타서 내어 주는 분, 그러한 섬김이 몸에 배어 있는 우리 교회 권사님 같은 분이 기독교인이다. 소수자를 혐오하지 않고, 약자에게 곁을 내어 주고 보살피는 사람이다.
정치적 신념이 다르다고 비난하면서 배타하면서 심지어 죽여야 한다는 이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정의가 무엇인지 살펴야 한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못 박혔는지 알아야 한다. 최소한 기독교인 그것도 종교가 타락해서 개혁하겠다고 나온 신앙 공동체, 초대 교회와 같이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직접 예배할 수 있다는 만인사제설을 신봉한다면 지금과 같은 일을 벌여서는 안 된다.
누구나가 사제의 역할, 신도, 평신도로서의 수평적 관계에서의 내적 성찰과 삶이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들이대면서 무속에 심취하고 술에 취해 허황 방탕한 생활을 하며 망상에 사로잡혀 영원히 독재하면서 살고 싶어 계엄령까지 내린 권력자를 옹호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면서 타자를 비난하는 일이 과연 그리스도의 뜻이라고 믿는가?
어떤 성찰이나 깊은 학습이 없어도 그저 상식선에서 복음서 한 장이라도 읽고 생각한다면 이래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극우 목회자의 말이 하나님 뜻인 줄 알고 성찰 없이 무비판적으로 받아 들이던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현재의 모습이 이해가 가면서도 그래서는 안 된다고.. 이런 글이라도 끄적여야 한다고.
나 또한 정확하게 기준이 생겨서 그 공간에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곳을 빠져나오는 데 몇 년이 걸렸다. 그래서 더욱더 이런 글이라도 더 끄적거리고, 더 많은 사람과 삶으로 만나고 대화하고 적절하게 안내하면서 관계하는 일이 무엇보다 더 중요한 시점이라고 여긴다. 쓰다 보니 길어졌다. 누구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저 기독교인으로 조금은 정신 차리고 삶을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주저리 주저리 늘어놨다. 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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