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먹은 사람을 ‘어른’이라고 하는 줄 알았다. 다 자란 사람으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 ‘어른’이라고 사전에 쓰여 있지만 이상하게도 우리 지역, 사회에 어른이 없다는 이들이 많다.
“동짓날 기나긴 밤 한 허리 베어내어 춘풍 이불 밑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얼운님 오신 날 밤 굽이굽이 펴리라.” 황진이의 시조다.
어른은 시조에 보이듯이 ‘얼운님’에서 온 단어다. 우리에게 어른은 나이 먹은 사람이 아니었다. '어른'은 ‘얼우다’라는 동사에 접미사 ㄴ이 결합된 용어다. 그러니까 ‘얼운’이 변형된 것으로 남녀가 몸을 합한다는 뜻이다. 결혼한 사람이 어른이 되어 상투를 튼다는 말이겠다. 몸과 마음이 성숙해서 남녀가 사랑을 하고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 과거에는 어른이었다.
그런데 왜 어른이 없을까? 나이 먹고 자기 일은 책임지며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이가 어린이라면 우리 사회 어른이 차고 넘쳐야 하지 않을까?
지난해 “줬으면 그만이지”라는 책을 날을 새며 읽다가 새벽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김장하 선생님의 삶을 엿보면서 생각이 많았다. 이분의 다큐 제목이 “어른 김장하”다. 어른은 김 선생님 수준은 되어야 했다.
한약방을 열어 20대부터 장학사업을 시작해서 1,000명이 넘는 학생을 지원했다. 40살에는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엄청난 돈을 들여 명문고로 만든 뒤 8년 만에 국가에 헌납했다. 진주신문이 창간하자 권력이 무서워할 게 있어야 한다면서 매달 1,000만 원의 운영비를 10년여 지원하셨다.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진주문화연구소 등 지역 내 시민사회 단체와 문화예술, 학술연구, 환경 등 수많은 영역에 도움을 줬다.
차도 없이 낡은 양복에 닳디 닳은 구두를 신고 다니는 분. 누구나가 ‘어른’이라고 하는 분이다.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강의하면서 매주 내주는 숙제가 있다. ‘성찰글’이다. 나도 매일 써 보려고 노력한다. 내 수준에서 어른이 되려는 발버둥 중 하나가 나를 돌아보는 일, 곧 성찰이었다. 인간이기에 인간다운 삶을 살아 보려는 과정에 가장 중요한 일이 성찰이라고 믿었다. 어른은 성찰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했고 그러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 정도로 이해했다.
나이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는 줄 알았지만 내가 나이 들어 보니 알았다. 어른은 나이와 관계가 없었다. 철이 든 사람이라고도 하지만 요점은 ‘철’이 뭔지도 잘 모르겠다. 타자에 대한 수용이 큰 사람일 수도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해 보인다.
“오늘 사랑 한 것”에서 림태주 작가는 “자신 안에 있는 선과 악을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진짜 어른이 된다”라고 했다. 특히 “선량하게 살려면 악을 방관하지 않는 책임과 용기가 있어야 한다.”라며 어른은 그런 존재가 아닌가라고 설명했다.
어른은 나설 때와 참을 때를 알아야 한다. 약자들에게 더 수용적이며 자신을 돌아보며 성찰하고, 권력자들의 불의에는 나서야 한다. 어린이, 청소년, 선후배 등 누군가 찾을 때 함께 하면서 힘이 되어야 하는 존재로서 자신보다는 타자와 사회에 어떤 가치를 두어야겠다. 사랑도 나누어야 하고 가족에 대한 사랑도 넘쳐야 한다. 어쩌면 나서지 않고 조용히 안 보이는 곳에 있지만 항상 빛을 내면서 폭풍우와 안개에서 힘들어 하는 배를 안내하는 등대와 같은 존재가 어른일 수도 있겠다.
쓰다 보니 내 모습이 보인다. 나는 어른 되기는 틀렸다. 내가 29살이라고 계속 떠들고 다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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