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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새길

밥과 같은 사람

by 달그락달그락 2023. 10. 11.

지난 오후 예배에서 목사님께서 유대인은 사람을 세종류로 구분한다고 하셨다. 병과 약, 밥 같은 사람이다. 병을 주는 사람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 말해서 무엇하랴? 병 걸리면 아프다. 약 같은 사람은 평소에는 잘 만나지 않고 도움이 안 되는데 아플 때나 외로울 때 와서 돕는 사람이다. 밥 같은 사람은 항상 옆에 있으면서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일까? 내 주변에 사람들은 나에게는?

 

바울은 자기 죽음을 예견했다. 두 번째 감옥에서 순교를 앞두고 ‘디모데’에게 전하는 편지를 쓴다. 자기 죽음 이후에도 계속해서 선교할 수 있도록 그를 격려하며 힘을 북돋아 주는 글이다.

 

이 편지에 ‘오네시보로’가 등장한다. 바울은 그가 자신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쇠사슬에 묶여 있을 때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로마까지 자신을 찾아와서 만나 주었으며, 교회에서 많은 봉사를 했다고 설명한다.

 

 

드러나지는 않지만, 꾸준히 봉사하면서 조직의 바탕을 이루며 없어서는 안 되는 ‘밥’과 같은 사람이 ‘오네시보로’다. 바울이 마지막 죽기 전에 꼭 기억해야 할 사람으로 안내한 분, 밥과 같은 사람이다.

 

어떠한 조직에서건 튀는 사람이 있고, 대표성으로 인해 얼굴이 드러나는 사람이 있다.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두드러지게 보이는 사람도 있다. 드러나지 말아야 하는데 계속 자기 얼굴만 드러내고자 노력하는 이도 있다. 반면 외부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꾸준히 그 자리를 지키면서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있다. 밥 같은 사람이다.

 

밥과 같은 사람. 이 사람들의 특징은 꾸준히 봉사하면서도 드러나지 않고, 리더가 힘겨워할 때 격려하고 용기를 준다. 바울이 갇혔을 당시에는 감옥에 찾아가서 죄수를 찾아 응원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두가 바울을 외면 할 때도 ‘오네시보로’는 감옥을 찾아서 위로했다. 바울이 죽기 전(죽음을 예견한 후)에 떠 오르는 사람 중에 ‘오네시보로’를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다.

 

우리는 죽기 전에 누구를 떠 올릴까?

 

베이컨이 쓴 <학문의 진보(1605)>에서는 인간을 거미와 개미, 벌 3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거미형 인간은 흔히 자기중심적인 인물로 비유된다. 거미는 그물을 쳐 놓은 뒤 기다리다가 걸려든 먹이를 먹어 치운다. 대안 없이 불평하거나 남의 결점만 끄집어내는 이들이다. 포식자들 기득권을 갖고 이기성을 갖는 이들을 비유한다.

 

개미형 인간은 열심히 일하는 부지런한 사람으로 밖으로 나가 먹을 것, 입을 것을 집으로 가져와서 저장한 뒤 소비한다. 사회적인 문제의식은 없다. 지식을 모으기만 하지 유용하게 사용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꿀벌 형이다. 꿀벌은 꽃을 찾아서 침과 섞어 꽃가루를 꿀로 바꾸어 낸다. 음식을 절대 혼자 먹지 않는다. 꽃을 발견하면 돌아와서 동료들에게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가 꿀을 수집할 수 있도록 독려까지 한다. 꿀벌을 통해서 꽃도 피고 환경이 좋아지는 것을 더할 나위 없는 자연의 혜택이다.

 

여기에 더해 키에르케고르는 꿀벌 대신 나비(형)를 추가했다. 거미형이 과거를 먹고 사는 퇴영적 유형, 개미는 우직하고 성실한 현실주의자이고 나비형은 미래지향적 유형으로 분류한다. 나비는 적절한 시점에서 탈바꿈을 해가면서 성장한다. 쉬지 않고 탈바꿈하는 것이 이상적인 캐릭터라는 것.

 

꿀벌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하고, AI와 4차산업혁명 운운하는 현재에는 나비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우리는 밥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은 것인가? 꿀벌은 어떤가?

 

우리 사회는 개미를 넘어서 어쩌면 거미형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아닌가? 부조리한 사회는 내 버려둔 채, 경쟁만으로 치닫고 그 최상위 포식자가 되기 위해서 본질은 온데간데없이 나만 잘 먹고 사는 공간을 만들어 내는 이상한 엘리트주의적인 공간에 입성하기 위해서 발악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최상위 포식자의 위치만 올라가면 된다는 이상한 우월의식과 입시와 전문직만을 편중하는 사회?

 

아마 사람을 분류하는 방법은 오만가지는 될 거다. 인간 유형을 극단화하면 생기는 전쟁은 어떤가?

 

유대인들은 유대인과 이방인 딱 두 가지로 나누었다는 기록도 있다. 기준도 간단했다. 할례를 받은 사람과 받지 못한 사람이다. 신약에서 모든 게 깨져 나갔지만, 그들의 우월의식과 특권의식이 아직까지도 내포된 특이한 민족성이 존재한다. 유대인이 아니면 모두가 이방인이라는 것.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 가자지구에서의 학살.

 

최근 하마스의 무차별 공격으로 많은 이들이 살해당했다. 그 어떤 논리로도 이들을 옹호하지 못한다. 또한 그간에 이스라엘이 가자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민족에게 저지르고 있는 악행 또한 용서받을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떤 유형의 사람을 원하는 것일까?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극단적으로 우리 민족, 나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힘의 논리로 모든 것을 갖고 싶은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회는 아닌가?

 

결국 이스라엘과 같은 힘의 논리로 지배하면 모든 언론이, 힘 있는 모든 나라가... 그들을 추앙하는 사회, 추앙하는 관계를 꿈꾸는 것일까?

 

밥이나 벌, 나비는 모두가 거미와 같은 사람에게 포섭되어 움직여야 하는 사회를 꿈꾸는 것은 아닌지? 우리 사회를 움직여 나가는 이들이 밥과 같은 사람, 꿀벌과 같은 사람들이 아닌 거미와 같은 사람들이 조종하게 내 버려 두는 것은 아닌지?

 

아.. 모르겠다. 쓰다 보니 글만 길어져. 요즘 사회 보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