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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및 관점/칼럼

학교 밖 청소년만 문제 있다고 우기는 사람들

by 달그락달그락 2017. 8. 13.


[출처. jtbc 차이나는 클라스 방송 홈페이지]


고등학교까지 학교 교사에게 많이 맞았다며 ‘교육이 모두 이럴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한 후 많은 것을 깨달았다며, 현재에는 스텐포드대학교 교육대학원 부학장으로 일하는 폴김 교수가 방송에서 ‘질문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의했다. 공부가 아닌 노동을 하는 학습에 대해서 문제 제기한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삼성에 취업을 어떻게 해요?”라며 질문하는데 외국 학생들은 “삼성보다 큰 기업 어떻게 만드느냐?”는 질문 한다고. 


우리 학교는 모두가 획일적이다. 과거의 학교는 폭력적이기까지 했다. 그나마 획일성도 기업 만드는 일이나 인간다운 삶을 위한 창의성 있고 지속 가능한 어떤 과정에 집중하면 좋을 진데 매번 안정성 운운하며 대학입학만을 위해서 올인한다. 그러니 창업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고 9급 공무원 경쟁률이 50대1이 넘는 최악의 경쟁을 만들어 낸다. 


발가락 아프고, 치과질환 있고, 무좀도 있는데 모두 소화제 주는 겪이다. 학생들은 많이도 힘겨워 하고 부적응하기 마련이다. 요즘 우리 학교 구조에서 부적응 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출처. 청소년지원센터 꿈드림 페이스북 페이지]


그런데 말이다. 며칠전 여성가족부와 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에서 사과문 발표했다. 이 사과문의 내용 또한 이해할 수가 없다. 국가기관에서 ‘학교 밖 청소년 멘토링 가이드’라는 매뉴얼 만들어 보급했는데 그 내용 중 ‘학교 밖 청소년들의 공통적인 특성’이란 글이 있었다. 그런데 사과문에 학교 밖 청소년의 공통적인 특성이 아닌 학교 밖 ‘부적응’ 청소년의 공통적인 특성이었다며 사과했다. 


자……. 여러분도 한번 해석해 보시라. 



[출처. 학교밖청소년 멘토링 가이드. 여성가족부/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


다음은 학교 밖 부적응 청소년의 특성 중 몇 가지다. 목표의 부재라며 미래에 대한 불안, 장래희망의 부재, 욕구의 잦은 변동, 무기력함, 학교 다니는 것에 대한 의미상실. 거기에 불규칙한 생활 습관에서는 시간약속을 지키지 못함, 올빼미족, 숙식이 불안정, 부모들 방치 등이다. 학교 밖 부적응 청소년의 공통적 특성인가? 미래 불안, 욕구변동, 가끔 무기력, 올빼미족 등은 대부분 나에게 해당된다. 


학교 다니는 학생들은 어떤가? 앞에서 주장했지만 특성은 똑같다. 다만 빈도 수준에서 차이가 날 수도 있겠다 싶다. 누구나가 그렇다. 상담관계 형성 어려움이라고? 학교 열심히 다니면서 공부도 잘하지만 라포형성 어려운 친구들 있다. 학교 열심히 다니면서 분노조절 장애 있는 청소년도 있고, 폭력성 때문에 많이도 힘겨워 하는 학생들도 있다. 그리고 우리사회에 입시에 몰려, 학생이라는 위치 가진 청소년들 상당수 불안감 갖고 있지 않는가? 학교밖 청소년만 불안하고 상담이 어렵나? 


글을 쓰면서도 자꾸 화가 나려고 한다. 청소년에 대한 이러한 사회적 통념이라는 무식하게 일반화 되어 있는 관점들이 청소년들을 힘들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문제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청소년은 ‘이럴 것(?)이다’라고 규정짓는다. 그리고 학교 밖 청소년이니 이렇게 ‘문제가 많을 것이다’라고 세금 들여 연구해서 규정 짓는다. 그것도 국가 기관이 개발한 매뉴얼에서 학교 밖 부적응 청소년들은 이런 유형이라고 대 놓고 낙인찍어 버린다. 


학교 밖 청소년들이 가장 힘들어 가는 것 중 하나가 그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회적인 시선이다. 학교를 그만 두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을 부정적으로 개념 짓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학생들이 학교를 그만 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학교가 원하는 교육을 제공해 주지 않아서가 가장 높게 나타난다. 또한 특기를 살릴 수 없고, 학교 폭력 때문이다. 여성가족부가 2015년 조사한 학교 밖 청소년실태조사에 나타난 결과다. 집안의 경제적 문제나 일진 등 학교 내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이라는 통념과는 전혀 다른 게 현실이다. 


학교 밖 청소년의 잘 못된 사회적 인식을 개선해야할 국가 기관들에서 그들의 가장 힘겨운 문제를 부각하고 강조하는 일을 한다는 게 나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의 관점을 거칠게 나누어 보면 딱 두 가지다. 대부분 일반화 되어 있는 문제적 관점으로 백년도 전에 홀이 주장한 ‘질풍노도기’ 운운하면서 청소년들은 매우 혼란스럽고 복잡하여 가르치고 대상화해야 하는 관점이다. 너(청소년)는 내담자이고 나는 상담자(전문가)로 내가 전문가이니 너의 문제를 내가 고치고 치료 해야 할 사람이라는 관점. 또 하나는 역사, 문화적 관점이다. 그 시대에 그 상황에 사람들은 모두가 다르다는 것을 존중한다. 영문 표기도 다르다. 전자는 상담 분야에서 많이 사용하는 관점으로 ‘adolescent’이고 후자는 ‘youth’이다. 


나는 청소년을 ‘시민’이라고 수년째 강조해 왔다. 경험의 빈도를 제외하고는 기성세대와 별반 차이가 없다. 그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바라보는지에 따라 교육, 상담, 활동, 복지 등 모든 내용들이 바뀌기 마련이다. 상담을 하건 복지를 하건 최소한 그들의 인권은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 


학교 밖 부적응 청소년들의 특성을 이렇게 부정적으로 개념 짓는 것은 인권 침해다. ‘너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규정짓는 일들을 왜 이렇게 쉽게 하는지 이해 할 수가 없다. 


우리네 청소년활동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모두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 주는 것. 그 안에 사람 관계가 있다. 당연히 친인권적으로 그리고 민주적으로 어떻게 관계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맥락이다. 끊임없는 질문 안에 상호간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활동이다. 경험과 체험에서 가슴이 만나는 일들이 중요하다. 


학교 밖, 학교 내 등 사람을 어떠한 공간에 가두고 규정짓는 틀을 만들어 내는 것 자체가 문제로 보인다. 한사람의 성향을 이렇게 부정적으로 규정짓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국가에서 운영 지원하는 전문기관이라는 곳에서 학교 밖에 부적응 하는 모든 청소년들의 특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나가도 너무 나가지 않았나 싶다. 


청소년은 사람이고 그 시대의 역사와 문화가 있는 시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