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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활동/청소년자치공간_달그락달그락

교회에서의 청소년사업

by 달그락달그락 2010. 11. 20.

지인이신 전도사님의 소개로, 지역의 청소년사업을 준비하는 큰(?) 교회의 관련 장로님 등 관계자 분들을 만났습니다. 교회에서의 청소년사업(복지)에 자문을 구한다고 하셨습니다. 어르신 관련 봉사를 5년여 간 해 오셨고 하십니다. 이러한 일이 지역에서 긍정적으로 알려졌으며, 그러한 가운데 청소년사업을 준비하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봉사부장님의 형님이 서울 근교의 교회 장로님이신데 30여 년 전에 시작한 어르신 봉사를 지금도 똑 같은 분이 맡아서 하신다고 하십니다. 70대 어르신이 70대 어르신을 봉양하는 셈이지요. 그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으셨다고 하시네요. 교회가 급격히 늙어가고 있다며 걱정이십니다.

 

교회가 늙어가고 있다는 말씀에 공감하는바 큽니다. 청소년들이 성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적습니다. 청년들을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에 청소년층이 없다고 표현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종교 가운데 개신교가 갖는 현재의 위상을 들먹이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도 힘겨운 모습이 많으나, 현재의 일반적인 환경에서의 교회 모습이 유지되어 30년 후의  모습을 그려보면 답답한 마음이 큽니다. 이러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 저 뿐만 일까요?

 

찾아오신 분들이 긍정적이시고, 무언가 새롭게 일을 진행시켜 보고자 하는 열의가 대단하십니다. 감사하고 기쁜 일입니다. 두 시간여 대화 나누며 컨설팅 아닌 컨설팅을 하게 되었습니다.

몇 가지 제안 드렸습니다.

 

먼저는 급하게 어떤 프로그램적 접근은 지양한다는 것입니다. 어르신들 을 섬기는 것과 청소년들을 당사자로 하는 사업은 차이가 큽니다. 일단 참여하시는 분들과 청소년사업을 지원하고자 하는 재정 등 교회 역량에 대해 파악하는 게 우선입니다. 이후 실제적 역량을 집결해 청소년과 관련한 전문 교육과 논의과정을 거쳐야합니다.

 

두 번째 이러한 과정 가운데 가능하면 장기적인 교회의 청소년사업의 큰 그림을 그려 보는 것입니다. 완벽하게 되지는 않더라도 가능한 만큼 그려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다만 비전, 이상, 철학에 대한 부분은 교육과정에서 논의하며 만들어 갈 것이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전략적 접근 또한 이를 기반으로 생산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교회에 청소년관련 센터 또는 사회복지 관련 기관을 설립하거나, 교회에 성도를 모으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목표로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개교회에 사람들을 집결시키려는 방식이 현재 개신교가 성장할 수 있었던 장점이기고 하였지만 역으로 가장 큰 단점으로 비추어지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살아생전 행하셨던 일들에 비추어 볼 때 건물 크게 짓고 사람 모으는 행위가 맞는지 고민입니다. 섬긴다는 말의 뜻을 자기가 속한 교회에 성도들을 많이 채우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사회사업, 청소년사업 등의 일들이 교회건물에 사람을 채우는 도구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생명을 살린다고 주장하지만 그 안에 우리의 물질과 명예, 영향력을 넓히려는 욕심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똑같은 행위를 하더라도 청소년사업을 행할 때의 그 의도에서 이 부분이 가장 다른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청소년사업 자체가 예배였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을 만나고 함께 하며 나누는 그 순간이 하나님께서 받기에 가장 온전하고 합당한 예배였으면 좋겠습니다. 사회복지가 단순히 교회 건물에 사람을 데려오는 미끼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건물에 사람을 데려오는 행위 자체가 선교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과  시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였으면 좋겠습니다. 일주일에 몇 차례 교회에 가는지 모르나 교회당에 가서 앉아 있는 시간 이외의 모든 시간이 예배가 아닌 그저 세상에서 돈을 버는 수단으로서 또는 교회 건물을 넓히는 역할로서의 일이라면 참으로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 건물은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가 허브역할을 해야 한다 믿습니다. 교회 건물 과 교회 안의 몇몇 임직자분들과 성도 분들만을 섬기는 것이 아닌 교회가 지역사회를 섬겼으면 좋겠습니다. 지역사회의 청소년들과 함께 하는 곳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네 번째 교회에서의 청소년사업의 효과에 대한 평가(검증)를 바로(?)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변화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도 청소년시기에 단순히 몇 가지 프로그램으로 우리가 꿈꾸는 사람으로의 변화가 가능한 일이 아니지요. 이 때문에 청소년사업을 더 어려워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극단적인 예이나 어르신들 병수발, 목욕이나 독거노인 분들 집수리 등을 행하게 될 때와 청소년들의 어떤 프로그램적 접근을 행할 때의 극명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아이들의 멘토링 사업을 하더라도 어르신들에게 무언가 대접할 때와 전혀 다른 양태를 보이지요. 단순히 한두 회기 프로그램 진행하고 나서의 비판적 평가가 얼마나 유익할까요? 평가가 무익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더 장기적으로 바라보며 교회를 통해 지역사회의 청소년들이 자신의 환경에 참여하며, 밝아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섯째 청소년사업을 시작하게 되면 개인과 교회에 득이 많습니다. 제안했듯이 청소년과 지역사회를 알 수 있는 교육과정 안에서 자녀교육과 함께 교사 교육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마지막으로 많이 모으려 하기 보다는 교사와 청소년과의 높은 수준의 관계형성을 하는데 중점을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에서의 대부분의 일정과 사업이 그렇듯이 사람들을 많이 교회에 데려가는 것이 선교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해준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입니다. 대화하고 소통하며 그 분의 의견을 받고 여쭙고 나누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먼저 만나는 것은 교사와 교인들이지요. 결국에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는 먼저 만났던 교사와 부모 등 지인들이겠지요.

 

그들이 예수님의 자녀로서의 근본적인 삶의 모습을 유지하지 않은 채 청소년들을 강압하여 교회에만 앉혀 놓는다고 해서 얼마만큼의 효과가 있는지 의문입니다. 자기 돈 들여 전화하고, 간식 먹이고 차 태워 교회에 데리고 왔는데 너희들이 왜 말을 듣지 않느냐며 화를 내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러한 교사분들을 옹호하며 데려다 앉혀 놓은 아이들을 훈화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제가 예전에 이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혼자의 기분에 취해, 선교라며 아이들을 위한다며 강압했는지 모릅니다. 정말 잘 못했다는 것을 철저히 깨닫는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행위하는 교사에게는 선교적 행위일지 모르나 받아 들이는 아이들 입장에서는 자칫 힘겨운 강압일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본이 되는 교사와 교인, 그들을 강압하거나 통제하려 하지 않고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그저 본을 보이며 존중하고 사랑하셨던 그 모습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후 아이들과의 관계를 실제적으로 해석하며, 그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 주는 지도자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글을 쓰고 있는 저에게 여쭙겠지요? 당신은 집사라며 교회에서 얼마만큼 잘하고 있습니까? 잘하는지 잘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몇 년간 청소년부 일은 하지 안고 안내위원만 명받아 삼년여간 주보 나누어 드리고 안내하는게 제 일의 전부입니다. 글로 쓸 수 없는 제 안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저 사회에서 청소년사역하며, 제가 만났던 그 하나님의 나라를 희망하며 몸부림 칠 뿐입니다.

 

실질적인 교회의 청소년 선교사업은 제게 풀어야만 하는 특별하고도 막중한 과제임에는 분명합니다. 이를 위해 준비하는 게 있습니다. 조만간 때가 되겠지요. 제 수준에서 딱 그만큼 행하겠지요. 자꾸만 이렇게 좋은 분들을 알게 하시고 만나게 하시는 그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고민하며 기도하게 됩니다.

 

오늘 찾아오신 분들의 교회에 청소년사업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귀한 일들로 잘 이루어 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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