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을 바꾸어 보려고 치열한 삶을 사는 이들이 있다. 아프고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서 함께한다.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서 연대하며 최선을 다한다. 청소년,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등의 힘겨운 사회 문제를 바꾸어 보려고 몸으로 부딪치는 이들도 있다. 사람과 사회의 변화에 확신을 가진 이들이다.
반대로 세상은 바꾸기 어렵고 사람들의 변화도 불가능에 가까우니 당신의 삶을 살라고 충고하는 이도 있다. 타자를 바꾸려는 일 자체가 무모한 일이라는 주장도 한다. 자신과 타자의 행복을 위해서도 서로를 그대로 놔두는 것도 존중이다.
어른의 행복은 이래야 한다는 어떤 책에서는 “진정한 어른이란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를 바꿀 줄 아는 사람일 테니까”라고 했다. 자신이 옳다는 것을 자녀와 배우자, 친구 등 가까운 이들에게 강요하려고 할 때 혼자 남겨지는 경우가 많다는 예까지 든다. 한편에 맞는 이야기다. 사람의 변화는 쉽지 않고, 상대에게 내 의견을 강조한다고 해서 변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 말의 ‘본질’은 틀렸다.
어릴 때 부모나 자녀에게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라고 해서 컸는데 정말 건강하게도 자랐다. 25살이 되어도 건강한 몸을 가지고 방에서 게임만 하고 야동만 보면서 일하지 않는 자녀가 있다. 그래, 나는 “너의 삶을 존중할 거야. 그대로 살아라.”라고 하는 부모가 있을까? “진정한 어른은 세상을 바꾸거나 사람을 바꾸는 게 아냐.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를 바꾸는 거지. 넌 너의 삶을 살면 된단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극단적인 예이지만 우리는 안다. 내 가까운 누군가가 잘못되거나 문제가 있을 때 어떻게든 도움 주려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전문적인 상담자나 교사, 복지사 등의 일을 하면서도 당사자의 문제에 개입 보다는 절대 나서지 않고 적절한 선에서 형식적 관계를 맺는 이들도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은 사람의 관계에서 행복하고 감동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관계 때문에 큰 아픔을 겪는다. 관계를 내려놓고 나의 마음을 보호한다면서 내 좋은 것만을 상대와 관계하고, 서로의 변화를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 삶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 단절 사회는 우리를 더 큰 괴로움으로 이끈다.
우리 사회에 부정적인 문제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사람이 많을 때 좋은 환경이 된다. 상대가 잘되고 복이 되는 일이라고 믿을 때 안내하고 설명한다. 힘겨움에 관여하며 상대에 어깨에 눌린 힘겨움을 같이 지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는 건강해지기 마련이다.
몇 년 동안 유행한 심리학과 관련 된 책에 대부분의 요지는 “나를 위해서만 살라”고 한다. 나만을 위해서 타자와는 선을 긋고 그 이상을 넘지 말라고 한다. 변화는 없고 개인의 힘겨움은 크고, 오히려 관계를 파괴할 수 있다면서, 오지랖 부리지 말고 네가 행복한 것만 찾아서 너만 잘 살도록 하라며 타이른다. 여기에 많은 위로를 받기도 한다. 타자가 네가 그은 선을 넘을 때는 가감 없이 차단하며 너의 영역을 지키라면서, 무슨 강아지가 자기 구역에 오줌 누고 다니는 것처럼 살라는 이들까지 있었다.
한편으로 맞는 말이다. 나를 지켜야 잘 산다. 문제는 나만을 위한 삶만을 사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사회는 어떻게 될까? 나만을 위한 삶에 집중할수록 더 외로워진다. 불행도 비례해서 커진다.
사회라는 공간에서 자신만을 위해 이기성을 발현할수록 관계는 깨지고 개인은 더욱 외로워지고 힘들어진다는 말이다. 나만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나와 사회 둘 다를 망가뜨릴 수 있는 개연성이 크다.
계엄령이 터지고 나라가 풍전등화인데 강아지 사진 SNS에 올리고 웃고 즐기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사회의 다수를 차지할 때 민주주의 사회는 어떻게 될까? 민주주의가 망가지든 말든, 나라에 전쟁이 있든 말든 나는 내 할 일이나 하겠다는 이들도 있다. 셀럽이라는 다양한 활동을 하는 연예인들의 행태를 보면서도 생각이 많았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회사에서 직원들과 적정한 선을 지키되, 서로가 어느 정도의 선을 넘어도 ‘신뢰’할 수 있는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 긍정적인 인간관계가 아닐까 싶다.
타자가 변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안내해 봐야 나만 고립되니 선을 지키면서 내가 잘 살 궁리를 하라는 소리는 한 부분만 맞다. 사람이 신뢰를 쌓기 위해서는 반드시 갈등이 있기 마련이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정과 사랑도 싹튼다. 노력하는 만큼 반드시 변화는 있다.
개인적, 공동체적, 사회적, 전 지구적 변화는 반드시 있다. 그 변화의 중심에 언제나 움직여 나가는 그 누군가가 있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켰던 사람들은 언제나 다수가 아니었다. 불완전하고 문제가 있는 공간에 구멍을 뚫고 “이게 옳다”고 빛을 보이는 이들었다.
사람의 변화가 없다면서 나만 잘 살고 내 관점 잘 바꾸어서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이들도 많지만, 그럼에도 우리 사회 전체가 잘되기 위해서는 문제 해결에 참여해야 옳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 우리 회사의 직원들, 동료 선후배들이 긍정적으로 변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나누고 교육하고 연대하며 함께하는 이들도 있다. 선을 긋고 으르렁거리는 것이 아닌, 가급적 선을 지우고 교제하고 나누고 연대하며 신뢰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 이들이 많아져야 좋은 사회다.
어떤 선택이든지 자신이 한다.
‘행복학’과 지나친 자신만의 행복 강박이 사회 구조의 불평등이 심리적 결점 때문이라는 식의 비난 문화(blame culture)의 중심이 된 과정을 보여주는 책이 있다. ‘에바 일루즈’와 ‘에드가르 카바나스’가 쓴 <해피 크라시, Happy Cracy>다. 행복해지는 방법은 “내가 상대와 선을 긋고 나만 더 행복해질 거야” 대신에 “내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거야”라는 사회참여적 관점으로 바뀔 때 행복해진다고 했다. 초점이 나에게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타인에게 맞춰져 있는 것, 그것은 행복의 역설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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