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전 일정 마치고 오후에 하려고 준비한 일이 있었다. 모두 못했다. 걸려 오는 전화가 많았고 갑자기 비틀어진 ‘일’ 해결하느라 바빠졌다. 땀도 삐질삐질. 정신 차리니 저녁 시간이 됐다. 밥을 먹고 잠시 걸었다. 멍하게 걷다 보니 ‘해망굴’까지 왔다. 조용한 공간에서 생각도 많았지만, 기분은 다시 좋아졌다.
내가 일을 하는 것인지 나를 일이 조종하는 건지 모르는 하루였다. 사무실 들어와서 늦게까지 일 마무리 했고 귀가했다. 오늘 오후에 하려고 했던 일은 끄적이고 싶은 글이다. 정확히 말하면 출판사 계약한 원고 써야 했다. 지난해 쓰고 싶어서 한다고 한 일이다. 활동하는 연구소와 달그락의 모금하고도 연결해 놓은 책이다. 가장 우선순위로 하고 싶은 일이었는데 몇 달째 후순위로 밀려 있어서 조금 답답하다.
현장에 치열한 활동을 글로 쓰고 정리하는 일, 책 읽고 요약하면서 내 안에 성찰글 쓰는 일, 사회현상에 비판적 관점을 견지하면서 쓰는 글을 좋아한다. 시간 날 때마다 강의하는 과목에 대한 대학(원) 이론서도 쓴다. 글 쓰면서 가끔 걷고 역기 들고 운동하는 일까지 내 좋아하는 일들이다. 하지만 매번 현장 일에 밀려 가장 후순위로 밀려 있다.

“글을 쓰는 행위 자체는 회사 생활의 다른 모든 업무와 다를 바 없는 ‘노동’이지만, 실은 나는 글쓰기를 통해 일종의 ‘존재 증명’을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소모적으로 남의 일을 해주고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내 목소리로 나만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는 그 감각이, 수면장애를 앓으며 쪽잠을 자면서도 계속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나의 현실을 버티게 해주었다.” <대도시의 사랑법>을 쓴 김상영 작가가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라는 책에 쓴 글이다.
30대 글을 쓰고 싶어서 새벽 5시에 일어나 바로 출근한다. 1시간 가까이 총 세 번의 환승을 거쳐 회사 근처의 카페에 도착해서 9시 출근 전까지 글을 쓴다. 등단해 책까지 낸 소설가지만 그렇게 살았다. 사무직 회사원으로 일하는 동시에, 나머지 자투리 시간을 짜내고 짜내 글을 쓰는 ‘투잡’ 노동자. 퇴근을 한 뒤 서너 시간 남짓 회사 근처의 카페에서 글을 쓰고 집에 돌아오면 자정이 다 된다고 했다. 그렇게 침대에 누우면 참을 수 없을 정도의 허기가 몰려와서 또 먹고 비만해지는 악순환에서 나온 글이다.
김 작가는 글쓰기가 자기 “존재 증명”을 위한 일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나라고’ 내가 있지만 내가 없어 보이는 회사의 부품이 아닌 나 자신으로서의 증명을 글로써 하고 싶었던 것만 같다.
“나는 누구인가?” 수 많은 학자들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이 질문을 청소년기에 시작하고 중점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라고 중얼거리지만 우리는 모두 안다. 내가 누구인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극히 적다는걸. 아니 찾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을.
내 존재의 증명은 어쩌면 나의 정체성하고 연결되어 있다. 나는 나라는 것. 그래서 내가 한다는 것. 그 “하는 것”이 나와 연결되어 있고 어떤 목적과 가치가 있는 일이어야 한다. 그 안에 어떤 희망도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내가 나로서 증명되지 않고 그저 그런 자본주의 수단으로 존재 없이 사라져 가는 노동이라면 사람은 절망하게 된다. 요즘 청년들은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어쩌면 자기 존재의 증명이 갈급한지도 모르겠다. 그 존재의 증명을 위한 일을 찾도록 도와주는 일이 우리네 나이 먹는 사람들이 진정성 가지고 집중해야 하는 일일 수 있다.
존재 증명, 내가 나 됨. 그런데 말이다. 그 어떤 ‘희망’을 가지고 내가 이루고자 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그 이후의 삶이 어떻게 되는지는 생각해 보았나?
나는 박사학위를 받으면 뭔가 되는 듯싶었다. 공부했고 학위도 받았다. 자격증 따면 뭔가 된다고 여겼다. 학위도 받았고, 취업했고 승진하면서 기관장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여겨서 기관장도 됐다. 어느 순간 직장을 때려치우는 게 ‘희망’이라고 여겼고 그렇게 했다. 그리고 창업한다면서 프리랜서 선언하고 강의하고 연구하며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하고 싶었다. 꿈꾸는 청소년기관을 만들어야겠다면서 민간의 힘으로 몇 개 기관도 만들고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살다 보니 계속해서 어떤 희망을 안고 그곳에 집중했다. 좋은 목표였고 나름 무언가 조금씩 성취도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희망이라고 붙잡고 어떻게든 아등바등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알게 됐다. 매번 간절히 바라던 것을 이룬 후의 삶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계속해서 어떤 목표를 만들고 나아가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사는 게 좋은 것이라고 여겼다.
꿈과 희망을 품고 나아가는 일도 중요하다만, 그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 있었다. 내 삶이 어떤 목표를 위해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지금 내 ‘감각’이 느끼는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 지금, 이 현실이 나를 살게 하고 또 하루가 나를 버티게 한다. 계속해서 나를 가혹하게 밀어 붙이면서 오늘 하고자 했던 일을 못 한 죄책감이나 불안감을 불어 넣는 일은 멈춰야 옳다. 이미 지난 일을 할 수도 없고 그 때문에 갖는 죄책감은 현재를 불안하게 한다. 현재가 현실을 살게 해야 한다. 과거가 나를 붙잡게 하면 안 된다. 지금을 붙잡아야 산다.
내게 주어진 오늘 하루를 온전히 몰입하면서 살아 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응원받아 마땅한 존재다. 오후와 저녁에 해야 할 일을 못 하더라도 그 시간을 또 열심을 다해 살아낸 당신(나도) 박수받아 마땅하다. 그러니 오늘도 너무 자책하지 말자. 또 내일이 있다.
지금부터 잠들기 전까지는 읽던 책 읽는 시간도 있다. 오늘 써야 하는 글을 내일 또 쓸 수 있을지는 모른다. 계속해서 만들어 가는 희망 또한 내일의 무엇이 아닌 현재다. 희망은 멀리 있는 빛이 아닌 지금 내가 안고 있어야 한다. 삶은 유한하지만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은 영원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나 된다는 것, 지금, 이 감각을 느끼면서 이 순간을 살아낸다는 것. 바로 그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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