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은 다른 동물의 몸에 기생하여 영양분을 빼앗아 먹으며 사는 동물이다. 관계 맺는 타자에 붙어살면서 서로 손해를 주는 사람들의 영화. 기생충. 인간관계, 빈부에 따른 계급, 가족, 욕망(경쟁), 세습 등 몇 가지 키워드 보인다.
기생충은 숙주의 영양분을 몰래 빼 먹는다. 숙주는 모르거나 알면서도 내버려 둔다. 다만 숙주는 절대로 기생충과 동등한 관계를 맺지 않는다. 관계는 단절되어 있으나 숙주나 기생충 각각의 가족의 관계에는 정이 넘친다. 본능이면서 각자 관계의 애정이다.
가끔은 기생충이 숙주가 되고 싶어 숙주를 죽이는 일도 있다. 동식물의 관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인간사회에서 관계는 잔인하다. 유전에 의해서 그대로 전이되는 동식물의 관계와는 다르게 인간관계는 사회구조, 개인의 욕망과 사회계급, 폭력성까지 포괄적으로 작동된다.
우리 사회에도 숙주와 기생의 관계는 엄연히 존재한다. 가족관계 내부에서부터, 사회 구조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계급화 되어 나타나는 사회적 위치도 만들어진다. 숙주가 기생충이 되기도 한다. 나락으로 떨어져 힘들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 나락이 일상적인 삶이 되는 이들도 있다. 그 나락의 기생충들이 숙주가 되는 일은 엄청나게 힘든 사회. 경쟁적 계급, 개인의 욕망과 욕구 그 어디쯤에 서 있는 우리들 모습이 적나라하다.
사람은 누구나 선한 면이 있고, 누구나 악함을 가지고 있다.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우리 내 사회 계급의 위(부) 아래(빈곤)에 따라 완전히 선함과 완전한 악함으로 나뉘지도 않는다. 누구나가 내면에는 선과 악이 존재한다. 다만 내면의 선과 악을 어떻게 조절하고 삭제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한다만, 사회 구조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계급의 위아래가 노력에 따라 자연스럽고 기생하는 사람들이 적거나 없앨 수도 있다. 사회구조적 문제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방안들 널렸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숙주라고 여기는 소수의 사람들은 기생하는 사람들을 자신과 같은 숙주로 안내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그들은 내가 맡고 싶지 않은 냄새를 풍기는 자들이고, 내 일을 도움주고 내가 먹여 살리는 기생사람 정도로 치부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위 계급의 외피 적으로 약자들에게 웃으면서 관계하나 절대로 기생한다고 여기는 사람들과는 관계 맺지 않는다. 냄새조차 역겨워하지. 부를 축적한 자들이 숙주라고 우기는 이들이 있을 수 있으나 우리는 안다. 재벌의 2~3세대 넘어가면서 너무나 많이 보아 왔다. 거대한 기생충이 숙주인 대다수의 약자들의 피를 빨아 사는 경우다. 오히려 그들에게 나는 썪은 냄새들 나는 역겨워 맡기가 싫다.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누구나가 기울여야 하고 이 지랄(?) 맞은 우리 사회 구조에서 어떻게 사는 게 인간다움을 지키고 조화롭게 사는지는 철저히 개인의 몫이 되었다. 경쟁과 계급을 넘어서고 구조적 모순을 나름대로 해결하며 누가 숙주이고 기생충인지 나누지 않고 그런 것 조차 모르게 서로간의 냄새를 맡고 존중할 수 있는 사람다운 나름의 조화로운 삶.
꿈꾸지 말고 지금 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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