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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및 관점/칼럼

타자를 변화 시키려는 힘과 관계의 어려움

by 달그락달그락 2018. 8. 17.

누군가 싫어서(이유가 있다) 화를 내면 당사자는 화를 낸 사람을 언짢아하기 마련이다. 그의 어떤 문제나 행동이 싫어서 화를 냈으니 타자가 화를 내거나 언짢아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그 문제를 좀 바꾸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지만 이 보다는 너 참 못됐다는 마음이 지배적인 경우다. 이런 일은 쿨(?)하게 받는다. 


화를 내는 모습은 같지만 이와 다른 지점이 있다. 누군가 잘 되게 돕기 위해서 강하게 이야기 할 때다. 무엇을 바꾸어 주기 위해서 문제제기 하고 강하게 어필할 때. 특히 교육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나름 엄격한 편이었다. 기관에서 후배들에게도 이런 일이 간혹 있다. 강하게 이야기 하려고(화를 내는 것처럼 보일 꺼다) 마음먹을 때 가슴 한 켠이 너무 무겁다. 


뉴턴의 ‘작용 반작용 법칙’이 사람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힘이 작용할 때 반작용인 저항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문제를 이야기 했을 때 수용하며 적절히 대응하고 관계하면 좋으련만 사람들은 잘 못을 이야기 했을 때 저항하거나 상대의 관계가 깨지며 힘들어 하는 경우가 많다. 예전에는 이런 무거움에 대해서 내가 나를 이길 힘이 있었는데 요즘은 쉽지 않다. 그냥 내 버려두고 싶은 마음이 갈수록 커진다. 저항의 과정과 함께 관계의 틀어짐이 싫기 때문이다. 또 한편에 최근 나의 주장이 과연 100% 옳은 것인가 하는 내 안의 갈등도 한 몫 한다.  



좋은 게 좋은 것인가? 


대학이나 대학원 강의를 유심히 본다. 집중하는 학생들이 많은 강의도 있지만 절반 이상이 다른 일을 하거나 아예 잠을 자는 경우. 선생은 당연히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내 버려두는 사람도 있다. 자율적인 대학에서 이러한 행태를 보이는 학생들은 그러한 책임도 그들이 지면된다고 주장하면서서 자든지 수업 중 나가서 들어오지 않든지 그냥 둔다. 그렇게 말하는 선생의 자녀가 강의 시간에 잠만 자거나 스마트폰 가지고 장난만 한다면 똑같이 이야기 할 수 있을까? 


학교에서만 이런가?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좋은 것이 있고, 나쁜 것이 있다. 좋은 것은 받아야 하고 성장 시키고 함께 해야 하면서 좋다고 해야 한다. 하지만 나쁜 것은 나쁜 것이다. 가치에 맞지 않고 정의롭지도 않으면서 나태함을 키우는 등의 기준에 맞지 않는 일은 배척해야 한다.  


나만 배척하는 게 아니다. 내 주변에 사랑하는 이들이 혹여나 잘 못된 어떤 일에 있을 때 말해 주는 게 옳다고 본다. 설레발이 심해서도 아니다. 최소한 내 가까운 이들이 잘 못된 태도나 이야기 할 때에 변화하도록 돕는 게 맞지 않나? 


내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다. 후배, 선배, 연구소의 위원 분 등 나도 편하게 속 이야기 나누려는 분들이 계셔서인지 그들도 나에게 직언하는 일이 있다. 어떨 때 저 분이 조금 오버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도 해 보지만 정작 깊이 곱씹어볼 이야기들이 많음을 알게 된다. 연구소의 후배들이 나에게 직언하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타자가 나에게 이 정도의 이야기를 할 정도라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하는 그런 생각들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감사함이 커진다. 


좋은 것 좋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쉽다만, 나쁜 것을 나쁘다고 직면시키며 강조 하는 일은 참으로 고역이다. 나쁜 일 또는 부족한 일을 나쁘다고 이건 부족해서 채워야 한다고 행하는 그 과정의 여러 일들에 대한 고민들이 있다. "그랬구나. 저랬구나" 라면서 타자의 환경에 대해서 이해만 해 주는 일들을 통해서 변화가 있을까? 관계는 좋아 질 지언정 그 문제에 직면해서 해결해 보려는 타자의 힘은 변화가 크지 않음을 알게 된다. 



청소년, 청년, 그리고 그 어떤 배움을 청하는 이들에게 전달하는 그 목적에 핵심은 그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전부다. 잘 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문제에 직면하고 되든 안 되든 이겨 보려고 움직이며 그 문제에 마주하는 그 어떤 힘을 갖도록 돕는 것도 한 부분이다. 각성이기도 하고 참여 수준 높아짐이기도 하다.  


그러한 각성과 참여 수준 높음의 과정에서 확인해야 할 지점은 나와 타자와의 관계의 수준이다. 어느 정도 수준의 이야기를 할 정도라고 여길 때가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관계만 틀어지고 변화는 없게 된다. 상대를 위한다면서 힘을 쓰는 일이 변화는 없고 오히려 관계만 망치는 경우다.  


이전에 모 지자체에 간부들 워크숍인가 초대받아서 강의할 때였다. 내 딴에 열정만 넘쳤을 때에 강의 대상인 국장, 과장 하는 분들이 워크숍에 집중하기 보다는 몇 명은 스마트폰 켜 놓고 다른 일 하기 일쑤였다. 강의 중 기분이 좋지 않아 농담처럼 스마트폰을 어찌 한다고 했던 기억. 기분이 좋지 않았을 꺼다. 전혀 관계없는 어떤 공간에서 강의 등으로 사람을 만날 때에는 그 질적 내용에 집중할 일이다. 


중요한 것은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우리 안의 관계에서의 변화다. 화를 낼 때에 타자가 받을 수 있는 힘이 있을 때를 파악해야 하고, 그 관계의 설정도 잘 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겠다. 


외부에서 전달하는 여러 요인들이 있다. 특히 문제를 문제라고 이야기 하고 직면시키려 할 때의 그 반발과 관계의 틀어짐에 대한 문제들. 어쩌면 그 힘겨움이 싫어서 상당수 많은 이들이 타자의 문제를 보고 알면서도 내 버려두는 것은 아닌지. 내 상태를 보니 앞으로 나 또한 그런 사람이 되지는 않을지? 장담할 수가 없는 그런 때다. #여름이_가는가_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