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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및 관점/마을과 관계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만날 수 있으려면

by 달그락달그락 2018. 7. 18.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만날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가능하면 타자의 많은 것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려는 노력이 선행될 때 가능할까? 

사람을 있는 그대로 만난다는 것이 가능할까? 


조직생활하다가 모두 정리하고 밖으로 혼자 나와서 무허가 연구소1 할 때다. 타자의 관계에서 예전에 조직 안에서의 친밀도와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오히려 이전 조직 안에서 깊은 관계를 맺기 보다 밖에 공간에서 쉽게 관계가 된 일이 많았다. 조직 안에서의 내밀하고 내면적인 모습들 보다는 조금은 큰 운동을 위한 전국 연대, 공동연구, 또는 강의 등을 위해서 만나는 관계들이 상당수였다. 대부분 조직안의 친밀한 관계이기 보다는 조금은 느스한 네트워크였다. 이 때에 사람들의 관계는 그 순간에 만나는 인상과 태도 등에 의해 결정 지어지는 일들이 많았다. 



조직 안은 다르다. 사람의 친밀도도 다르고 조직 안에서의 활동을 위해 깊이 관계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다르게 나타난다. 매일 봐야 하고 밥을 어떻게 먹을지부터 A4용지 쓰는 것까지 눈에 보인다. 삶의 세세함들이 얽혀 들어갈 때의 사람간의 관계는 참으로 오묘해 진다. 개개인의 역량을 볼 때 그 사람 자체의 어떤 전문성이나 관계성을 보는게 일반적이나, 그 사람이 실제 자기 역량을 펼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지는 않는 그 조직 안의 여러 관계가 긍정적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보자. 비싼 스포츠카가 달리기 위해 속도를 내는데 비포장 도로라면? 그 차는 망가지기 마련이다. 조직 문화가 그렇다. 그 안의 여러 관계에 얽혀 있고 그 관계에 따라 비포장 도로가 되기도 하고 아우토반이 되기도 한다. 또는 사이드 브레이크를 올리고 달리는 차를 생각해 보자. 악셀을 아무리 밟아도 차는 천천히 가거나 곧 퍼져 버린다. 그만큼 치명적인 것이 조직안의 관계다. 


사람을 사람으로 그대로 만난다는 것. 조직 관점에서 개인의 역량 운운하는 일들 또한 여러 문제들이 얽혀 있기 마련이다. 


살다 보니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 안에서 다양한 환경과 역사와 맥락을 마주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너무 좋은데, 어떤 사람은 살짝 불편하기도 하지. 사람을 받아 들이는 관점에서 나쁜짓 하는 나쁜놈들만 아니라면 옳고 그르고의 차이는 아닌 것 같다. 그냥 다른 거다. 그 다름이 나의 기준으로 평가 된다는 것인데 이게 많은 문제를 낳기도 하고 긍정적 일들을 만들기도 하지. 다름은 내가 평가 하기 마련이고 그 다름을 아는 인식의 기준은 내가 가지고 있다. 그 기준은 어디에서 왔는가? 나의 인식의 근원을 아는가? 


쉽지 않겠지만 나이 먹을수록 다름에 대한 이해를 넓히려고 많은 노력을 한다. 다만 가치기준을 붙잡아야 하겠지. 자신의 가치 기준이나 신념이 없이 무비판적인 수용은 자신이 아닌 자신이 되고 말거든.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가치 기준이 나름의 신념이라면 내안의 나를 끊임 없이 의심도 해야 한다. 신념을 의심하고 성찰하지 않으면 자칫 괴물이 되고 말지. 


그 의심의 과정에도 붙잡아야 할 것은 그 때까지의 가치다. 이를 놓아 버리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게 되니 말이다. 다시 반복하지만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이해 한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나의 입장에서 타자를, 타자의 입장에서 나를 바라보는 그 관점들의 기준을 설정하고 알아가는 것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고, 그 인식을 하는 기준인 단편적인 한면의 모습 또한 그 사람의 모두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를 보자 마자 침을 뱉는 청소년을 만났다. 그 청소년은 일진인가? 분노조절 장애자인가?

나를 보자 마자 윙크를 하는 여인을 만났다. 나를 사랑하는 건가? 나에게 구애하는 건가?


청소년은 만날 시간 지켜 미리 와서 서 있다가 갑자기 목에 들어온 먼지 때문에 가래가 나왔을 뿐이고, 지나가던 묘령의 아름다운 여인은 바람으로 날라온 먼지가 눈에 들어간 것 뿐. 타자의 행동이나 태도를 내 마음데로 해석하고 판단하면 바로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


상호 소통은 타자를 아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과정이다. 소통을 통한 서로 간 표현의 해석과 더불어 다름을 이해할 수 있는 수용성이 커지는 것이다. 나는 사람의 ‘수용성’이 커진다는 것이 성장이라고 생각한다. 


내 주변에 나에게 직언하며 어떤 일이건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는 분들이 계시다는 것은 나에게는 큰 복이다. 나와 세상의 관계와 내 관점이 투영되는 구체적인 반응을 알게 해준다. 그 반응을 알았을 때 내가 어찌 반응하느냐에 따라 그 수용성은 커지기도 하고 옹졸하게 줄어 들기도 한다. 내 안의 수용성을 크게 하거나 줄이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다. 




가능한 많은 이들의 다양한 관점에서 옳고 그른 지점을 알아가려는 노력이 더욱 더 필요한 것 같다. 이 곳에 포스팅하는 글들도 조금은 더 다듬고 정갈히 할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욱(?)해서 쓴 글에 감동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상처를 받기도 한다. 정치인이나 고위직 공무원 등 내가 주로 비판하는 비판의 대상이 보았을 때 화를 내면 좋겠다만 비판의 대상이 아닌 분들이 그 글이나 말을 보고 듣고 아파하면 나 또한 많이 힘들다. 내 글빨 수준의 문제다. 내 입장에서 만큼은 타자에게 수용성을 넓히라고 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내 안의 소통 방식을 정교하게 해야 타자의 이해도가 높아진다고 보인다. 내가 할일은 단순해 보인다. 다름과 차이를 존중할 수 있는 수용성을 키우는 일과 함께 타자에게 전달하는 글이나 말 등 소통의 도구가 잘 전달 될 수 있도록 조금은 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 내가 사람을 사람으로 만나기 위해 해야 할 여러 일들 중 한가지다. 

  1. 법인이나 어떤 단체 등록하지 않고 간판만 걸고 활동할 때였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