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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활동/청소년자치공간_달그락달그락

평화는 삶이다.

by 달그락달그락 2010. 2. 28.

평화는 좋지 않는 것에 대한 반대를 말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평화는 선한 행동의 발현이다. 그래서 참여한다.

내가 속해 있는 환경에 최대한 참여하여 변화하고 변화 시키려고 노력한다.

만약 직장이 평화와 반대되는 곳이라고 가정해 보자.

전쟁무기를 만들거나, 포르노비디오를 제작하거나,

극단적 폭력을 부추기는 게임을 개발하는 곳이어서 사직한다.

군대를 반대하고, 폭력적 게임을 반대하고, 음란물을 없애기 위해 반대운동을 펼친다.

이러한 행위를 끊임없이 반대한다.

 

하지만 운동의 목적과 삶과 괴리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근래 사형제가 합헌이라고 결정났다.

개신교, 카톨릭, 불교, 원불교 모든 종단에서 유감을 표했다.

합헌 결정을 내린 판사들은 이러한 종교를 가진분들이다.

어떤 이들은 주관적 신념과 객관적 법리가 충돌할 때 법리를 선택하도록

훈련 받은 법관들이기에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과연 올바른 일인가?

 

생명운동을 하는 진보적 단체에서 낙태를 찬성한다.

전쟁을 반대하며 평화운동을 한다지만 군대를 종교문제 등으로 기피하는 이들을 비난한다.

과거 나치는 어떠했나? 집에서는 한 없는 자상한 남편이며 아버지이지만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한 살인마이기도 했다.

이러한 예는 수도 없이 많다.

삶이 양태가 분절되는 경우이다.

내가 가진 직업이 존재하고, 교회에서 만나는 이들이 있고,

저녁 술자리에서의 친구들이 있다. 인터넷 동우회의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축구클럽에서의 친구들이 존재한다. 모두가 다르며 그 환경에서의 자신의 모습도

다르게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환경에서 만나는 다른 이들과의 내 모습이 다르게 비추어지고

그 신념과 실행이 다르게 나타나는게 옳은 것인가?

 

하나님을 만난 이후 내적 평안함과 세상의 긍정성을 맛보았으나 오래 가지 못했다.

처음의 그 감동을 계속해서 갖고자 시도했으나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금도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계속해서 부딪치고 있는 중이다.

이 후 기독교적 가치를 가진 '청소년운동'이라는 정의를 얼핏 이해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게 되었다.

끊임없이 싸워야 할 대상을 찾아 평화를 이루고자 노력했다.

운동이라는 단어 아래 유해환경, 교육문제, 지역개발 등 청소년들과 관계된

다양한 사안에 대해 참여하여 제안하고 변화시키고자 노력하는 게

해야 할 일이라 믿었다.

 

하지만 열심을 내면 낼수록 순간의 감동도 있었지만

이와 함께 내적 피폐함도 커져갔다.

내부 조직의 모순도 이기지 못했다.

같은 목적을 가진 조직 내의 구성원들이라면

최소한 나정도의 고민과 기도, 그리고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몇몇의 지도력은 내가 행하는 일의 수준과 양에 비해 고민도 없어 보였고,

행함에 대한 실천력도 없었다. 더 큰 문제는 일의 열심도 없었다.

특히 열심을 내지 않는 이 부분은 나를 너무나 힘들게 했다.

 

소통하며 변화하려는 노력도 너무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몇몇의 잘 못된 지도력의 문제로 치부하고 결국은 실제 지도력간의 소통의

어려움을 이기는 길은 내 안에서 최선을 다해 실천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내부에서도 소통해야 할 일들이 발생했고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외적 운동과제도 실천해야 했다.

하지만 간혹 한두 명의 상부 지도력의 일양과 그가 가진 권한과 비교하며

피해의식도 발생했다. 이 또한 끊임없이 이겨내려 노력했다.

 

결국 수년이 흐르고 운동과정의 열심에 의해 위치에 비해

그에 따른 책임 또한 증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평화를 위해,

그리스도를 위해 행한다는 이 행위들이

내 안의 힘겨움으로 계속해서 커지게만 되었다.

 

청소년들 둘러싼 지속적인 문제에 반대하고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고,

아이들을 교육하고, 운동의 내용을 모델링하고,

사례를 개발하여 알리는 등의 다양한 일들을 끊임없이 진행했지만

내 삶의 본 모습을 보면서 계속해서 힘겨움에 쌓이게 되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것은 내 존재 자체가 가슴에서 이야기하는

본질적 삶을 전체로 살고 있는지에 대한 내 자신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공교육의 심각한 학교입시문제를 제기하며 학교 밖의 다양한 활동으로 보충하고자 했다.

청소년운동을 시작하면서 지금도 매우 중요한 운동과제로 삼고 있는 부분이다.

인권운동, 대안교육, 문화운동, 교육운동 등 여러 이야기를 주장하고 바꾸고자 캠페인하며

선거 때면 여러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제시하여 한두 가지 변화시키고자 제안을 하기도 한다.

아이들의 인권을 이야기 하고, 그들의 공동체성과 주체성 회복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제시하고,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지도력들을 훈련하는 과정을 만들고 지속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순간의 감동에서 멀어진 후 가슴을 들여다보면 허할 때가 많다.

해야 할 일은 세상에 넘쳐흐른다.

자본주의의 병폐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나로서는 그 어떤 것이 더 필요했다.

끊임없는 대안과 끊임없는 반대와 끊임없는 사안별 조직이 인생의 모두가 될 것 같아 두렵기도 하다.

더 큰 문제는 인간의 자주성을 주장하며 가치를 맞추려 노력하지만

결국 내 자신조차도 주체적으로 자주하기보다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 삶의 양태를 자세히 살펴보니 '그 나물의 그 밥'이다.

수입의 대부분을 가정과 교회, 기부하는 기관단체에 모두 다 사용한다고 해서 다른 이들과 다른가?

삶이 목적이 일상적 직업을 가진 분들과 차이가 있다고 해서 다른가?

그렇지 않다.

 

삶의 재조정이 필요하다.

공부도, 끊임없는 운동과제도, 이에 대한 실행도 모두가 지금 이 순간의 내 모습에 있다.

본질은 "싸워야 할 그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을 위해 살 수 있는 그 무엇이다."

 

나에게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살아계신다.

가끔씩 내 자아가 너무나 커져서 자꾸만 다른 욕망이 꿈틀거리기는 하나

여전히 살아서 나를 돌보심을 언제나 감지한다.

그 삶의 방향과 양태, 그 모두를 그 분을 위해 맞추어야 한다.

내가 행하는 삶의 방향에 따른 다양한 운동과정에 대한 전반적인 대안을 모색할 때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오직 삶 자체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삶의 모습 그 자체에서 말이다.

 

 

 

 

 

http://www.youthauto.net/zboard/view.php?id=example&no=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