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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및 관점/칼럼

알묘조장(揠苗助長), 청소년자치를 가장 쉽게 망치는 방법

by 달그락달그락 2026. 1. 30.

송나라에 한 농부가 있었다. 그는 논에 심은 벼가 잘 자라기를 바랐다. 가느다란 싹이 중력을 이겨내며 자라는 모습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부는 벼의 성장을 돕겠다는 마음으로, 막 뿌리내린 벼의 싹을 조금씩 뽑아 올려 주었다. 선한 마음이었다. 벼가 겪어야 할 수고를 대신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논바닥에 간신히 뿌리를 내리고 있던 벼의 싹들은 뿌리째 뽑혀 물 위에 떠올랐고, 결국 시들어 죽고 말았다. 농부가 벼를 아끼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벼를 사랑했다. 문제는 단 하나였다.

 

벼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벼가 원할 것이라고 자신이 생각한 것을 벼에게 강요했기 때문이다. 많이 알려진 이야기다. 사자성어로 알묘조장(揠苗助長)’이라고도 부른다.

 

청소년활동 현장에서도 낯설지 않다. 특히 교육과 복지, 활동 등 전문 영역이라는 공간에서 많이도 일어나는 일이다. 청소년은 입시 대상으로 치부하고 철저히 가르치려고 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아닌, 내가 경험한 대로, 교육받은 대로 무엇을 주입하려고 한다. 벼를 뽑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정말 큰 문제는 자신이 청소년을 가르치고 지시하는 그 확신의 경험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를 파악하지 않는 데 있다. 경험은 실패의 다른 이름이다. 패배가 아닌 실패는 체험을 넘어 경험이 되고, 삶의 학습 과정이 된다. 실패는 자기 선택에서 만나야 책임도 오롯히 자기 것이 된다. 그 안에서 성장은 자연스럽다. 어떤 일이 건 선택하게 되어 있고, 그 선택의 본질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실패 확률이 낮아지거나, 개인의 실패가 아니게도 된다.

 

이건 교사인 내가 안내해 주는 게 맞아.”

실수하면 책임은 누가 질 건데?”

 

이렇게 청소년을 위한다는 말은 넘쳐나지만, 그 말에는 청소년들이 선택하지 못하게 통제하며, 빠르게 성공시키고 싶어 하는 어른들의 욕심이 숨어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자치활동이 더욱 커져야 한다고 여긴다. 작은 모임에서도 청소년의 선택권이 최대한 보장되는 공간, 그들이 선택하고 결정하면서 나름의 책임을 질 때까지 기다려 주는 공간을 설계하고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스승이다.

 

달그락에서는 청소년들이 매주 각 자치기구별 달모임을 여는데, 자세히 보면 불안정함 투성이다. 회의 시간을 지키지 않기도 하고, 안건이 엉키기도 하며, 늦으면 노래를 해야 한다는 웃기는 벌칙도 난무한다. 결정된 사항을 밤을 새워 진행하는 청소년도 있지만, 무책임하게 하지 않는 친구도 있다. 결정이 갑자기 번복되기도 하고, 자치기구의 대표는 가끔 임원들과 함께 활동량이 많아 버거움을 토로하며 선생님들께 눈물을 보이기까지 한다.

 

어떤 이들은 이런 활동 자체가 너무나 비효율적이라며 벼(청소년)를 뽑아서(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끌어 올려야 한다고 말한다.

 

시키는 일을 잘하는 청소년들과, 자신의 공간에 참여하며 선택하고 책임지는 과정을 자주 경험한 청소년들의 삶은 학력과 관계없이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게 된다. 행복 지수도 다르다. 지향하는 삶의 목표도 다르고, 즐거움을 느끼는 지점도 다르다.

 

청소년자치는 교육하며 가르친다고 자라지 않는다. 참여 수준이 높아지면 자치하게 된다. 참여의 요체는 선택이다. 자기 선택이 실패해도, 다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부여할 때 벼는 뿌리를 내리기 마련이다. 뿌리를 내릴 시간을 허락받지 못한 벼는 겉으로는 삐죽 솟아나 빠르게 자란 것처럼 보이지만, 곧 죽고 만다.

 

우리의 역할은 완성도를 높이는 사람이 아니라, 과정이 무너지지 않도록 을 지키는 사람에 가깝다. 조언은 필요하지만, 결정은 넘겨야 한다. 보호는 중요하지만, 통제는 자치를 죽인다.

 

청소년자치, 참여를 주장하는 이들은 항상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내가 원하는 완성도를 앞당기려고 청소년을 가르치고 지시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그들을 존중하며 그들에 의한 삶이 되도록 돕는 사람인가?”

 

알묘조장은 결코 악의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청소년을 사랑한다며 잘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사랑도 배워야 가능하다. 청소년이 잘되도록 하고자 한다면, 정말 깊이 공부하고 고민하며 자기 성찰이 먼저 있어야 한다.

 

아직도 부족하고 실수투성이에 내적 감정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나지만, 그나마 이 정도의 사람 구실을 하며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자치활동을 하며 청소년들에게 배운 내 안의 경험에 있다.

 

청소년자치는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을 시민으로 존중하고, 입시 기계가 아닌 나와 같은 사람으로 인정하고 존대하는 문제다. 청소년을 존중하며 기다릴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청소년은 시민으로서 자기 힘으로 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