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아 보니까 알겠더라.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거야. 포기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거야.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반드시 어느 한쪽은 포기해야 해”
‘당신의 부탁’이라는 영화에서 나온 이 대사는 아직도 가슴을 내리누른다.
32살의 나이에 청소년 아들이 생긴 여자(임수정). 죽은 남편이 이전에 결혼해 낳은 아이다. 아이가 갈 데가 없다는 것을 알자, 혼자 사는 자신의 집에 데려와 함께 산다. 그 과정이 가슴 따뜻하면서도 아프기도 하고 먹먹했다. 가족은 누구이고, 어떤 존재일까?
9시 넘으니 막내에게 전화가 왔다. “아빵, 맛있는 거?” 군것질할 거 사 오라는 말이다. “뭘 먹고 싶은지 말을 해야 사지?” 막내는 “아무거나”, 난 “아무거나 모른다. 먹고 싶은 거 톡에 보내렴.” 하고 전화를 끊었다. 막내는 뭘 해 줘도 좋다. 내 딸이니 당연하지.
그런데 가끔은 뭘 사달라고 할 때, 용돈을 더 달라고 할 때 안 사주거나 못하게 막는다. 그럼 반드시 삐치(?)는 부작용이 있다. 그래도 돈의 씀씀이와 먼저 해야 할 일을 알려 주며 교육하기 위해서 일부러 안 주는 경우가 많다. 선택이다. 한쪽에 아이의 환한 웃음을 만날 것인지, 돈의 씀씀이와 우선순위 일을 하는 방식을 알려 주는 교육적 측면을 선택할 것인지. 모든 일이 그렇다.
‘참여’의 핵심은 ‘선택’이다. 어떤 일이든 결정하는 순간, 다른 한쪽은 포기해야 한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말이다. 어쩌면 참여하는 일이 어려운 것은 선택에 따른 다른 한쪽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포기하는 것에 집착하는 순간, 어려움이 커진다. 선택한 일에 책임지며 포기한 것을 빠르게 놓아야 한다. 책임을 지고 한 쪽을 포기하는 사람이 일을 잘한다. 잘되는 일은 뭐든 그렇다.
문제는 포기한 것에 집착하는 삶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것. 그래서 결정장애를 겪는 이들이 너무 많아 보인다. 결정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사람들은 참여수준이 낮은 이들이다.
어쩌면 ‘선택’은 ‘포기’의 한쪽 면인지도 모르겠다. 참여의 요체는 선택이고, 선택은 다른 쪽의 포기와 같다.
그래서 우리 사회라는 구조 자체는 한쪽이 완전이 승리하고 한쪽이 패배할 수 없는 구조다. 좌우, 진보와 보수, 남북, 영호남, 남녀, 세대 등 수많은 영역과 진영을 두고 싸움을 하지만 그 누구도 완전한 승자는 있을 수 없다. 모두가 이기기 위해서는 모두가 선택하면서 한 면을 포기해야 한다. 그 ‘포기’의 지점을 서로가 존중할 때 모두가 이길 수 있다.
일어나야겠다. 편의점 들러서 군것질거리 사서 귀가하련다. 이 순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포기하는 거겠지. 그래도 막내의 군것질 거리는 선택해서 아이의 환한 웃음은 볼 수 있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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