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매일 티셔츠와 속옷을 빨래한다. 늦게 퇴근해서 샤워하러 들어가서 먼저 하는 일이다. 루틴이 됐다. 그날 입었던 속옷이나 티셔츠를 손 빨래해서 베란다에 널어놓고 다음 날 햇빛에 말라서 뽀송뽀송한 옷을 만날 때의 촉감과 냄새가 기분을 좋게 한다. 건조기 들어갔다가 나온 옷과는 다른 내음이다.
빨래 널다가 몇 년인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에 빨래건조대 한쪽이 망가져서 기울어져 있는 것을 봤다. 이 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신경을 쓰지 않다가 너무 많이 망가져 있어서, 2주 전에 쿠팡에서 주문하고 한쪽에 세워 놨다가 어제 오후가 돼서야 조립했다. 30여 분 넘게 조립하고 세워 놓으니 그럴싸했다.
집안일은 시간 될 때나 설거지하고 청소하지, 규칙적으로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세탁기나 건조기가 아닌 손빨래라고? 몇 달 전에 읽었던 책이 매일 빨래하는 습관을 만들게 했던 것 같다. 그냥 그 느낌이 무언지 아주 조금 알게 됐다.
“나를 구원한 것은 ‘집안일’이었다... 중략..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월급이 꽂히지 않더라도 하루하루 그냥저냥 맛있는 것을 먹고 깨끗한 옷을 입으며 잘 정돈된 방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인생, 의외로 이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이런 게 바로 ‘풍요로운 생활’아닐까? 그렇다면 ‘행복’이라는 것도 자급자족할 수 있지 않을까?”
50에 퇴사하고 혼자서 도시가스도 냉장고도 없이 아주 작은 방에서 프리랜서로 혼자서 생활하는 여성이 있다. 아사히신문사에서 논설위원, 편집위원 등 고위직으로 근무하는 나름 잘나가는 언론인이었고 돈도 벌었으나 먹고, 입고 자는 일에 모두 돈을 쓰면서 지치고 힘겨운 도심 생활 접고서 새로운 삶을 찾은 ‘이나가키 에미코’가 쓴 <살림지옥, 해방일지>. 그녀는 자신을 해방시킨 일이 청소와 빨래였다고 고백한다.
누구 추천이었는지 몰라도 어쩌다 책을 사서 냉면 먹듯이 후루룩 읽었다. 속 옷 몇 장과 옷 몇 벌, 거기에 냉장고도 없이 혼자서 생활하는 저자 삶을 엿보다가 소소한 행복이 무엇인지, 삶이 어떻게 가야 하는지는 생각이 많았다. 새벽에 일어나서 가장 행복해하는 게 전날 빨래하고 걸어놨던 걸레를 가지고 집안을 구석구석 닦고 청소하는 일인데 이 일이 자신을 가장 행복하게 한다고 했다.
요즘에 더위 먹었는지 만사가 귀찮고 피곤하다. 잠도 자꾸만 깨고 아침이 무척이나 힘들다. 기관에 여러 일들이 한꺼번에 밀려오고, 계획했던 일이었는데 잘 안되는 것도 있고 생각도 많고 머리도 아픈 날이 반복됐다.
쉬는 월요일 늦게 일어나서 샤워하고 밥 먹고 책 읽고, 전화 오는 거 응대하다가 멍하게 있었다. 그러다가 이런 글 끄적이고 있다. 잘 산다는 건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날 하루를 잘 산다는 것, 걸레질이 자신을 해방시켰다는 저자의 말처럼 내가 행하는 그 어떤 일들이 나에게 그리고 그 누군가에게 복이 되는 일이면 좋겠다.
그리고 나같이 부족한 사람은 내 감정을 내가 잘 알아 가려는 노력이 더 많이 필요해 보인다. 왜 화가 나는지, 가끔은 분노까지 이는지, 밖이 아닌 내 가슴 안을 조금 더 깊이 봐야겠다.
피곤하고 귀찮다고 느끼는 것도 너무 열정적으로 했던 일이 대부분이다. 가슴 설레고 무언가 이루어 가면서 느꼈던 그 느낌, 그 감정은 무엇이고 지금은 왜 이런지도 돌아봐야 한다. 신기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어느 순간이 오고 누구를 만나면 또 끓어오르는 열정은 계속해서 돌아간다. 화나는 일, 분노 제공자를 만나도 그 일의 원인은 돌려놓고 보면 전적으로 내 문제라는 것도 깨닫게 된다. 어쩌면 모든 게 내 문제일 수도 있겠다.
올바른 삶도 없고, 모두가 같이 맞추어 가야 할 일상도 없다. 그저 자신이 자신을 알아 가면서 그 환경에 맞추어서 행복이라는 그 무엇을 찾아가는 일이 우리네 인생이 아닌지, 그 행복이 걸레질을 하고 자기 속옷을 빨며, 오후에 잠시 카페에서 책 읽고 글 쓰는 일만으로 가슴 충만한 행복을 느끼는 이들이 어디에나 있음을 안다.
세상에 부조리에 비판적 관점을 갖고 살며 무언가 변화를 바라지만, 그 안에서 소소한 삶의 행복과 감사를 끊임없이 찾아야 한다는 것. 그렇게 살아야 하지만, 또 이렇게 살고 있는..ㅎ
아이쿠야.. 쓰다보니 마지막 한 문은 손발이 오그라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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