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영성(Peace Spirituality)을 꿈꾸며
정건희 부장 (군산YMCA)
새로운 만남
근래 교회에 가면 가끔씩 불편한 심정이 가슴 안에 맴돕니다. 교인 중 어떤 일을 강요하거나 무어라 하지도 않지만 목사님의 목회철학에 100% 동조하지 않기에 일어나는 저만의 갈등상황에서 불편한 심정은 비롯됩니다. 그렇다고 교회를 옮길 생각은 아직까지 전혀 없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이 세상에서 저에게 100% 만족할 수 있는 교회는 존재하지 않으며 교회 공동체의 문제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저의 문제입니다. 저의 주관과 성찰의 단계에서 부분적 정도의 차이에서 판단하는 제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제 아내는 직업을 가진 채 매일 새벽 4시에 깨어 교회에서 기도하며 최선을 다합니다. 저를 최대한 섬기려 노력하며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항상 기뻐합니다. 그 기쁨은 제가 교회공동체에서 생각하는 이상적인 기쁨과 별반 다름없을 것입니다. 다만 가치를 지향하는 개인적 소신과 방법의 차이에서 제 안의 또 다른 제가 고민할 뿐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현재의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YMCA운동의 추구하는 가치지향의 방법이 조금은 다른 곳에서 그 분이 저에게 찾아 왔습니다. 그 이유를 몰랐었는데 근래 많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릴 적 철저한 보수적인 신학적 기초를 가지고 있는 교단에서 성장했지만 삶의 방편은 이와는 많이도 다른 곳에서 생명(그리스도)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이에 차이를 인정하는 삶의 구조적인 상황을 부여한 것이라 믿게 되었습니다.
평화의 시작은 내 안으로부터
때에 따라 전혀 다름을 인정한다면서도 가슴 안의 갑갑한 힘겨움을 계속해서 묻어 두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그 답답함은 누가 부여한 게 아님에도 손가락이 밖으로 향해서인지 타인(他人)을 보며 힘겨워 하기도 했습니다. 그 힘겨움은 주변의 환경이 부여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제가 만들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이를 안 이후부터 제 가슴을 들여다보는 훈련을 계속해서 하게 되었습니다. 낮아져야 한다는 그 분의 말씀 때문이기도 합니다.
지난 가평의 ‘바람과 물 연구소’에서 4일간 열린 평화운동 코디네이터 워크숍에 참여하면서 저를 다시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지역사회에서 운동(movement)을 행한다며 여러 일들을 만들었습니다. 개인적 신념 또는 지역사회의 환경, 청소년들의 욕구가 발생하면 변화를 위한 의미를 고민했습니다. 그 의미의 목적이 합당하다 결론지어지면 사람을 모으고 실질적 변화를 위해 움직이게 됩니다. 이러한 운동을 위해 청소년과 평화, 지역사회와 평화, 함께하는 단체와 평화 등 무수히도 고민하며 무언가 만들어 왔습니다. 워크숍 마지막 날 저의 짧은 생 가운데에서(특히 현재의 삶을 시작하기 시작하면서)철저히 소홀한 게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였습니다. 정지석 박사님께서 말씀하신 나의 평화영성에 대한 노력, 나의 평화에 대한 신념, 나의 평화로운 삶에 너무도 소홀히 했었던 것입니다. 내안의 평화를 위해 전혀 노력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상대적으로 많이 소홀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평화운동을 한다며 내 안의 평화가 없이 진행한다는 것은 사기일지도 모릅니다. 내 안에 없는 것을 나누려 한다는 것은 웃기는 모양새의 껍데기일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끊임없는 소통을 통한 내안의 평화를 만들어 세상에서 일구어 내는 게 우선입니다. 기도하며 고민하고 성찰하여 실천하는 가장 기본적인 패러다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상적인 조직을 꿈꾸며 무수히 접근해 만들어 보지만 결국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주춧돌은 나의 가슴에 의해 꿈이 현실화되기에 또 하나의 나를 항상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 안의 평화가 무조건적인 안정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수한 환경에서 나를 돌아보며 진실 된 평화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끊임없는 소통일 것입니다. 그래서 현 세상에서 너무 아플 수도 있습니다. 세상은 올라가라 하는데 평화의 본령이신 그 분께서는 내려가라고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주체는 사랑이며 차이의 인정은 평화의 시작
평화는 사랑이 주체이며 중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온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의 실천적 삶의 행위가 바로 평화를 일구는 구체적이고도 본질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다음은 함석헌 선생님의 “수난의 메시아” 중 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평화주의자라면 자기희생은 본래부터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우리가 싸우는 것은 저쪽을, 사회의 악한 것들을 세상에서 없애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저들이 나의 이웃이기 때문에, 우리와 한 몸을 이루는 한 지체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약하고 어리석은 자라도 버려서는 아니 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하는 싸움입니다. 사랑의 싸움이기 때문에 첫 번에 잘못하면 그 잘못한 것을 말해줘야 하지요. 안 들으면 들을 때까지 해야지요. 죽일 수는 없습니다. 만일 죽인다면, 아무리 내가 옳더라도, 그가 죽기 전에 죽이는 내가 먼저 죽어 버립니다.”
그렇습니다. 평화는 내가 아플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평화를 일구는 사람들은 각오해야 합니다. 그 평화는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나를 통해 일하는 그 분의 것이 더욱 맞기 때문입니다. 그 이상으로 움직이게 되면(movement) 세상적 행복이 아닌 가슴 안에 형용하지 못하는 기쁨이 만들어 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꿈꿉니다. 그 평화는 나를 위한 것이면서 나를 통한 아이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아이들과 지역민을 통한 지역사회의 변화이며 그 변화에 의해 세상이 변해 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생명이 언제나 존재합니다. 그 생명의 가치를 받아들이며 다양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조직적으로 접근할 때 많은 일들이 해결 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평화는 생명의 역동성이 부여되어야 합니다. 그 역동성은 한 생명의 가치로서 부여되어야 하지 타자에 의해 지시와 통제로 부여되어지는 ‘꼭두각시와 같이 줄 달린 조정당하는 인형’과 같은 움직임은 이미 죽은 생명입니다. 외적으로 보여질 때 움직임이 있다며 살아 있다고 하지만 그 안에는 지시와 통제로 인한 죽음이 존재할 뿐 다양성에 의한 창조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 청소년의 현실에서 이러한 인형의 줄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 줄을 잘라버리고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평화운동일 수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이 평화를 부여하고자 합니다.
“평화를 사랑하며, 사랑으로 평화를 일구는 사람 바로 평화영성(peace spirituality)이 풍부한 사람임을 믿습니다.”
그 평화가 발산되어 지역사회에서 영성이 풍부한 “평화를 일구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소망합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 [마: 5장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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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8월16일부터 19일까지 진행된 청소년평화운동 코디네이터 워크숍을 참여하며 개인적으로 느낀 점을 정리한 글입니다.